진로 유목민(2).
지금은 굉장히 시대착오적인 단어지만, 커리어 우먼이나 OO 우먼 등의 단어가 사회적으로 엄청 쿨했던 시절이 있었다. 여자들의 사회 진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는 방증이었겠지만, 언어적으로는 여전히 갈길이 먼 시기였었다. 시대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나 역시 저런 그때는 OO우먼에 동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우먼'앞에 '홍보'라는 분야를 붙이고 싶었다.
입학을 하고 오래지 않아 광고에의 비전은 접었지만, 내 전공 명칭의 다른 한 축인 홍보는 아직 살아 있었다. 광고만큼의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배운 것은 아니지만, 홍보 분야로 간다면 내가 전공 배신자가 될 거라는 죄책감을 덜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홍보에 대한 이론 개념을 배울수록 광고보다 더 거시적이면서, 덜 자본주의적이고 공익적이고 사회적인 느낌까지 받았기에, 다시 설레었다.
4학년 마지막 학기에 규모가 작은 '홍보 대행사'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재직 증명서를 학교에 제출하고 출근했다. 그 당시 나의 목표는 취직이 된 상태로 졸업식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지금의 나였다면 마지막 학기 수업을 더 꼼꼼히 들으면서 소중한 시간을 보냈을 텐데, 그때의 나에게는 그것만이 살 길 같아 보였다. 가뭄에 마른 논바닥 같은 내 스펙에 어디에서라도 물대기를 해야 했다. 경력에 굶주린 나는, 서둘러 홍보 우먼으로의 첫걸음을 딛고자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홍보우먼은 되지 못했다. 인턴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나왔다. 간절했던 그곳에 더 이상은 있을 수가 없었다. 모든 회사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 회사에서 요즘 흔히 말하는 열정 페이의 문제, 갑질 문제 등 사회 초년병이 겪을 수 있는 뻔한 클리셰들을 그 짧은 기간에 겪어 봤다. 부조리함을 떠나서, 일도 배울 것이 없었다. 물론, 인턴은 걸스카우트가 아니니까 배우기만을 바라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내가 보람차게 기여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들어갈 때의 고민보다 몇 배의 큰 고민을 하면서 나왔다.
학기의 막바지에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흘러간 몇 개월이, 빌려주고 떼인 돈처럼 너무 아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분산 도주한 잔병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자신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더 초라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까먹은 시간 속에서도 깨달음은 존재했다.
- 이론 속에서는 홍보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는데, 효과적인 홍보력은 결국 자본빨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
- 정말 재미있는 이슈라면, 언론들이 다뤄주는 줄 알았다. 하지만, 기사 게재는 광고 게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미디어에 노출되는 사람들은 다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다. 대다수는 대단한 분들이겠지만, 속 빈 강정도 더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장의 한 끗 차이로 막장이 예술이 되기도 한다라는 사실이 나 같은 애송이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 그리고, '때'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탐스러운 기회를 놓쳐서도 안 되겠지만, 조금 더 무르익는 시간도 필요하다. 배울 때는 잠잠히 더 배울 줄도 알아야 한다. 눈 앞의 지하철을 놓쳤다고 해서 목적지에 못 가는 것도 아니기에...
그렇게 풋내기의 보송했던 솜털들이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 홍보 업계에서 일하시는 분들, 오늘도 수고가 많으십니다! 당신의 땀을 존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