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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송희 Apr 07. 2023

이 세상의 기념일은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어

부탁이야 우리의 하루를 회색빛으로 만들지 말아 줘!



2012년 4월 7일

그날은 유난히 눈이 부셨다.

미세먼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맑을 하늘 아래

따스한 햇살이 감싸주면서 봄기운이 가득한

그런 날이었다.

그날 남편과 나는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사랑을 맹세하며 백년가약을 맺고 부부가 되었다.



그로부터 11년이 흐른 바로 오늘

이번주 내내 남편의 새벽퇴근이 또 시작된

타이밍에 결혼기념일을 마주하게 되니 마음이 슬펐다.


결혼기념일.. 대체 누가 만든 걸까?

사전적 의미로는 결혼식을 올린 날을 기념하는 날이며

19세기 서구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매년 결혼한 날

축하예배를 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일하는 남편이 제일 힘들겠지만

지켜보는 나도 늘 괴로웠다.

스트레스받은 만큼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남편과

감정쓰레기통이 되어버리는 순간이 많았기 때문에


과거에 비하면 많이 퇴근시간이 앞당겨졌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떤 프로젝트가 생기면

그때부터 또 새벽야근이 시작되는 것이다.

기한안에 끝내야 하는 일이기에 자는 시간조차

반납하면서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

회사의 시계는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았고

부숴버리고 싶었다.



결혼기념일 당일


바로 오늘아침

새벽 늦게 와 평소보다는 조금 늦게 출근준비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나 : 우리가 올해 결혼 몇 주년이지?

일기를 보니까 작년에도 아무것도 안 했네

남편 : 오늘은 회사출근 해야 하니까

내일 뭐라도 하자.

나 : 내일이 결혼기념일이야????


내 한마디가  아침부터 감정싸움으로 번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누구보다도 남편의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이 나지만

오늘만큼은 철부지 어린아이가 되고 싶었다.

화라도 낼 수 있는 권리정도는 가지고 싶었다.


두 달 전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이번 결혼기념일에는 꼭 오마카세 먹으러 가자”

이미 계획을 세워두고 있던 나였다.

그 이유는 9주년 때 10주년으로 착각한 남편이

명품가방과 꽃다발을 선물해 주었고

그로 인하여 10주년 때는 일상의 연속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미리미리 계획을 세워서 의미 있는 결혼기념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두 달 연달아 연차를 쓰기엔 눈치가 보이니까

저번달에 있던 내 생일날 연차를 쓰지 말고

결혼기념일날 써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런데 하필 중요한 프로젝트가 갑자기 이번주에

생겨  도저히 쉴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계획에 없던 일이라 당황했고

그 마음이 슬픔으로 바뀌게 되었다.


꼭 뭘 해야 돼?

내일 하면 안 돼?

왜 나만 맨날 챙겨야 돼?


라고 받아들이는 남편의 태도가

내 마음의 슬픔을 만들어내었다.

이번주 내내 잠이 부족하고 스트레스가

머리꼭대기까지 차올라있을 남편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결혼하는 그 주도 매일 야근을 했었다.

이제야 눈에 보이는 결혼사진 속 남편표정

애써 웃으며 지친 기색이 역력한 남편의 모습

그때는 몰랐다.

신혼여행 다녀오자마자 병원부터 갔으니까..



결혼 이후 오히려 기념일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챙기려는 내가 이상해져 버리는 상황이

자주 연출되곤 했었다.

그래도 선물과 꽃다발만큼은 매년 챙겨주는

자상한 남편이지만 이제는 선물로 퉁치는 기념일은

나에게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꼭 근사한 곳 아니더라도 남편과 아이들 없이

단둘이 밥 한 끼 먹는 시간을 원했을 뿐이다.


우리가 이렇게 결혼해서 집도 사고 아이 둘을 낳고

이 정도면 우리 참 행복하고 감사하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돈 벌고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한다고 그동안 고생했다며

다독여주고 감사하다는 마음을 주고받고

싶었을 뿐이다.



알아, 나도

덤덤해질 때도 되었는데…



기념일은 회사일로 치이고 넘어가는 것이

우리의 일상의 루틴처럼 콕 박혀있는 거

그 시간조차 우리에게 허용이 안 되는 현실에

인정하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숨죽이며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남편의 시간을 사겠다고 다짐한 지 7년

우리의 삶을 회색빛으로 물들게 만드는

상황들을 만들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짙어져 가는 회색빛을 없애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남편의 시간을 사려면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최소한 아무런 수입이 없던 제로에서

기운 빠지는 일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황까지는 만들었다.

조금씩 수입이 플러스가 되는 하루를 보내면서

희망을 만들어 내고 있다.



출근 후 남편의 문자

“미안해. 아마 오늘도 늦게 올 것 같아”


남편이 미운 것이 아니다.

남편과 대화할 시간도 없으니 회사의 사정을

자세히는 알지 못하고 단지 짐작할 뿐이다.

회사일이 바쁘구나라고..

그저 왜 일이 이렇게 많으며 잠자는 시간마저

반납을 해야 하는 건지 납득하고 싶지 않다.

그저 이런 현실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칼춤 추는 망나니가 되어

이해 따위 하고 싶지 않다.


결혼은 현실이야.

다들 그렇게 각자의 무게를 견디며 굳은살을

만들어내고 무뎌가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궁상맞게 혼자만 슬픔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 건지 자책하는 중이다.



아! 이럴 바에는

차라리 이 세상의 기념일이 영영 사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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