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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선씨 Jul 29. 2021

도망가자

휴직 13주 차

오며 가며 마주치는 버스정류장에 붙은 이 광고가 유난히도 마음에 와닿는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곳으로 도. 망. 가. 자. 온 가족이 수시로 찾아대는 데 지쳐버린 내 마음을 휘젓는, 기가 막힌 광고다.


이 와중에 눈치 없는 신랑은 기름에 불을 부었다.

"설거지 좀 바로 하지?"

"좋겠다. 낮잠 잘 시간도 있고."

어쩜, 말을 이렇게도 예쁘게 한다지.


해봐야 끝이 없고, 안 하면 티 나는 집안일이라더니. 정말로 그렇다. 해놓은 집안일에 대한 보상은 없고 타박만 받으니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나 싶어 진다. 문득 눈을 들어보니, 달력 한 귀퉁이에 박힌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로, 가족 중에 누구 하나라도 온갖 집안일을 동분서주하며 처리하고 있는 나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면, 나는 지금 이렇게 분하고 화나지 않았을 거다. 심지어 금요일 밤에는 나도 모르게 멍하니 있다가 왈칵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위험신호다.


이전부터도 얘기하긴 했다. 아무래도 방학이 되고 아이들이 모두 집에 있으면 우울해질 것 같다고. 휴가가 필요하다고. 혼자 나갔다 올 수 있게 시간 좀 내 달라했지만 신랑은 일이 바쁘다며 힘들다고 했다. 돈을 버는 일이 아닌 일을 담당하는 입장이니 어쩌겠나. 다시 꾸역꾸역 하는 수밖에.


토요일, 급격히 우울해져 가는 나를 보더니 안 되겠는지, 일요일에 나갔다 오라 한다. 가고 싶던 카페가 문 여는 9시에 맞춰 미련 없이 집을 나왔다. 혼자 브런치 먹고, 혼자 듣고 싶은 유튜브 조용히 듣고, 혼자 집중해서 책도 읽고, 혼자 생각도 하고 하다 보니 세상이 편안해 보인다. 온라인 수업을 듣는데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신다.

꽃에는 향기가 필요하고, 만남에는 그리움이 필요하다.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너무 가족들과 부대끼며 있었다. 그리울 틈이 없었다. 가족들이 그리워질 때쯤 들어가야겠다고 다짐하며 다른 카페에 가서 차 한잔 한다. 저녁으로는 고기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전에 아이 픽업 시간에 쫓겨 다 먹지도 못하고 나온 삼계탕집을 떠올렸다. 오늘은 가서 느긋하게 즐기고 먹어야지.


동네 맛집 삼계탕집에서는 밑반찬으로 김치, 풋고추, 쌈장을 주고 그냥 마셔도 되고 삼계탕에 넣어서 먹어도 되는 인삼주 한 병을 준다. 서빙하시는 분에게 풋고추는 안 먹으니 도로 가져가시라고 했더니, 잘못 알아듣고 인삼주를 다시 담으신다. 다급하게, 술은 먹는다며 킵하고 느긋하게 한 잔, 아니 한 병 한다. 오늘은 닭죽까지 끝까지 싹싹 먹어야지.

생각해보면, 가족들의 입맛을 고려해야 하다 보니 삼계탕을 먹은 적이 별로 없다. 음식 안 가리는 신랑이 딱 하나 안 좋아하는 게 삼계탕이라 굳이 찾아먹진 않았었는데, 그러고 보면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서로 맞춰야 한다는 뜻이니, 전적으로 내가 하고픈 걸 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저녁밥도 다 먹었는데 아직도 썩 가족들이 그리운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또 다른 맛집 빙수집으로 향한다. 한 그릇에 8000원이라 비싸서 많이 사지도 못하는데, 한 그릇 사면 애들이 다 먹어버려서 한 숟갈 먹기도 힘들었던 집. 오늘은 한 그릇 내가 다 먹는 사치를 부려본다.


어느덧 저녁 8시가 넘어가니, 아이한테 전화가 왔다. 막내다.

"엄마, 빨리 들어와~ 우리 저녁 다 먹어서 엄마가 일할 거 없어~ 빨리 와~"

 ㅎㅎ 귀여운 것. 막내가 보고 싶어 진다. 드디어 그리움이 생기는 것 같다. 하하


집에 들어오니 신랑이 한마디 한다.

"설마 저녁까지 안 올 줄은 몰랐는데. 삼계탕 맛있었어?"

"어, 나 삼계탕 좋아하거든?"

괜히 툴툴거려본다. 어쨌거나 쉬는 날 하루 종일 애들 케어하며 연락 한번 안 하고 와이프의 Me Time을 지켜준 신랑, 고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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