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콩의 시네마 드로잉
나는 원래 영화에 큰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2013년 개봉 당시 지하철과 TV에서 적극적으로 광고하던 ‘연애의 온도’ 티져 영상을 기억한다. 뜨겁던 연애의 온도가 미지근하고 평온하게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던 그 영상에 나는 홀린 듯이 영화를 보러 갔었다.
나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이 영화는 청불임에도 불구하고 200만에 가까운 관객수가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엄청난 명작도, 꼭 봐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비가 오는 여름날이면 가끔 놀이공원에서 주저앉아 우는 김민희와 무심하게 짜장면을 먹던 이민기가 생각나곤 했다. 이제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서른이 되어 다시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어른’으로 정해놓은 몇 개의 선을 넘은 내가 비가 많이 오는 여름날 다시 그 영화를 보니 왜 이따금 이 영화가 떠오르는지를 알 수 있었다.
취업 전 대학교 4학년 여름, 나는 누군가와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 우습게도 누구와 함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4년 전의 내가 이 영화를 보며 떠올렸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났다. 이 영화는 내게 어느 시절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과거 연애사의 미지근한 감촉을 떠올리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영화를 ‘리뷰를 찾아보게 만드는가’ 아닌가로 구분하자면 이 영화는 ‘그렇지 않은’ 영화일 것이다. 108분 동안 스크린에 흐르는 이야기는 너무나 일상적인 스토리와 배경, 그리고 보편적인-인간 본연의 찌질한 감성을 담고 있다. 그렇다. 이 영화는 “보통 사람들의 보통 연애”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에 쉽게 몰입하고, 나를 대입하여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이다. 숨겨진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고 리뷰를 검색하고 놀랄 필요도 없다. 이 안에 의미의 보물 찾기는 없다. 그저 각자가 느끼고 떠올리는 사람, 혹은 감정을 건져가면 된다.
장영은 얼마나 답답하고 바보 같은가. 이제 언니로서 그녀에게 “저런 놈은 만나지 말고 정신 차려”라고 이야기하는 나 자신은 얼마나 신비로운가 ㅎㅎ 나에게도 저런 때가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란, 또 사람의 변화란 놀랍다.
동희는 얼마나 찌질하고 한심한지. 하지만 남자의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다. 나뿐만 아니라 나와 만났던 사람들, 혹은 내 친구들, 친구들의 남자 친구들 속에 이 모습이 더없이 많이 보였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장영이나 동희였던 순간이 있었기에 수수께끼 같은 은유를 푸는 느낌 없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108분을 가지게 된다.
불치병도, 살인사건도, 타임 슬립도, 외계인도 없지만 내 삶과 가까운 이러한 영화가 좋다. 사건을 통해서 주인공을 극으로 몰아가는 이야기 구조가 조금은 지겹다. 매우 일상적인 사건들 속에서 섬세한 관찰로 인물들의 감정을 극대화시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이 좋았다.
엄청난 사건 속의 이야기에서 인물들은 때때로 전개를 위한 도구가 된다. 사건과 반전을 위해 희생되는 인물들을 보고 극장을 나오는 길에 ‘내 일이 아니라 다행이다’라는 감정을 잠시라도 느끼면 나는 우울해졌다. 스크린 속의 모든 일들이 픽션이겠지만, 그 픽션의 소재가 될만한 삶을 살법한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기 때문에 어딘가에서는 주목받지 못하고 해피엔딩으로도 끝을 맺을 수 없는 ‘희생양’과 ‘안타까운 삶’들이 있을것 같아서. 픽션일 뿐인데도, 만들어진 캐릭터인데도 캐릭터가 너무 소모적으로 이용되는 영화를 보는 것은 내게는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세상에는 너무나도 사소한 만남과 헤어짐이지만, 그들에게는 엄청나게 큰 용기가 필요한 ‘3퍼센트’의 기적을 바라며 다시 손을 잡는 두 남녀의 작은 이야기가 편안했다. 둘의 감정이 세상의 중심이기에 교통사고도, 불치병도, 살인마도 필요 없는 보통의 사랑 이야기. 비가 오는 날 누군가가 생각난다면 가볍게 보기 좋은 영화일 것이다.
행복의 상징인 놀이공원 안에서 쏟아지는 비와 이별의 말을 마주하는 모습은 신선함이 있었고, 연애란 롤러코스터와 같은 것임을 깨닫고도 놀이기구의 시간이 끝난 후 담담히 이를 내려오는 모습이 제일 좋았다.
추신1.
이 영화를 좋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애의 유통기한’ 에는 동감하지 않는 편이다.
추신2.
물론 영화가 자신이나 지인들을 떠올리게 하는 ‘공감’의 감정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인 만큼 이런 불합리하고 바보같은 연애를 해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전혀 재미가 없을 수 있다. 이번에 이 영화를 함께 본 내 남편은 “둘 다 이해할 수 없고 재미가 없다”라는 심플한 감상평을 날려주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