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th century women, 영화에 대하여
<20th Century Women>은 한국에서 <우리의 20세기>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어 개봉되었다. 영화를 보고 온 브런치 리뷰어 중 많은 이들이 영화의 주제를 가리는 이 일에 반대하는 의사표현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현재 한국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예민하고 부정적인 어감을 주는지를 나타내는 일로 기억될 것이다. 영화 관계자들은 원제인 <20th Century Women>이 여성운동의 여자만 나와도 혐오와 조롱이 난무하는 인터넷 세상에서 이 작지만 울림 있는 영화를 지키기 위해 제목을 변경했으리라고 생각한다(라고 믿고 싶다). 20세기 여성들의 주체적인 삶을 그린 영화에 원제보다 적합한 제목은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제목은 ‘우리’라는 말로 변경된 것은 ‘너’, 즉 타자의 공감대를 얻기 위한 시도였을 것이다. 즉 원제의 변경에서 페미니즘은 여성만의 것이고 남성은 이 이야기에서 타자이므로 ‘우리’라는, 너와 나를 포함하는 단어로 변경이 되어야만 남성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영화 관계자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변경이었다고 본다. 이 영화는 20세기를 살고 있는 3명의 여성과 그 가운데에서 그들의 삶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주체적으로 성장하는 1명의 소년을 그리고 있다. 영화 속에는 각기 다른 여성들의 삶이 있었고, 그리고 그들은 소년과 함께 어려움과 기쁨을 나누며 살아간다. 이 영화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이들이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는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예고편은 인스타그램 동영상들을 짜깁기 한 것처럼 파스텔톤의 아름답고 다소 추상적인 장면들의 연속이다. (사실 그래서 영화 자체에 큰 울림을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예쁜 영화를 보러 가리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영화 속의 영상들도 아름답다.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영상들은 모두 아날로그적으로 표현되어있다. 아날로그적이고 예스러우면서도 세련되었다는 점에서 영상의 톤과 아름다움에 힘을 쏟은 것이 느껴진다. 첨단 기술이나 CG가 들어갔다고 해도 보는 사람들은 느끼기 힘들 것이다. 영화가 그리는 20세기를 영상의 톤 앤 매너로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영화는 기승전결 구조를 따르지 않고, 사건에도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네 명의 화자들이 서로의 삶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대해 리뷰를 쓰기 어려워 계속 미뤄두었던 이유는, 이 영화가 가상으로 만들어진 스토리라기보다는 정말 20세기를 살았고 21세기가 오기 전에 가버린 주인공 도로시아의 실제 이야기로 느껴져서였다. 영화의 잔잔한 표현방식 때문인지, 담담하면서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인물들의 내레이션 때문인지, 아니면 나도 한 번쯤 해본 듯한 고민들을 토로하는 모습 때문인지 나는 도로시아가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았다.
이는 영화의 서술 방식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이 영화 속에서는 갈등-고조-해소의 단계가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영화와 달리 전혀 상관없는 갈등이 시시때때로 일어나고, 명확한 클라이맥스도 없이 제멋대로 해소되거나 잔류한다. 이 영화는 그러한 방식을 취하며 그녀의 삶과 고민을 조명하는데, 이러한 고민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의 고민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서 그녀에게 커다란 현실감을 부여한다. 이렇게 생생하고 충만하게 현실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녀는 99년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다고 한다.
커다란 스크린 속에서 너무나 생생하게 아들을 걱정하는 그녀지만, 영화라는 가상의 세상에서 조차 2017년에는 그녀는 죽고 없다. 2시간여 동안 그녀가 울고 웃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는데, 영화에서 그녀는 담담하게 ‘나는 죽는다’라고 말하는 대사 속에서 이 영화의 미묘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생기는 듯하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한 그녀는 이미 죽고 없다.
그녀가 너무나 이해하고 싶어 했으며, 너무나 사랑했던 아들 제이미는 이제 나보다 나이 든 어른이 되어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영화처럼 생생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의 삶도 어느 순간에는 사라지고 우리의 21세기는 영화 혹은 소설처럼 남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짧은 영화와 같은 이 삶 속에서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 걸까. 이에 대한 감독의 답변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 짧지만 찬란한 순간은 영화로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스포 하지 않겠다. 다른 멋진 리뷰에서 본 인상 깊은 말이 있는데, 이 영화는 정말이지 “정말 좋은데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렵네…” 싶은 영화니까. (글을 넘나 찰떡으로 잘 쓰신 리뷰이심) 감동적인 장면은 직접 확인하시기를 바란다.
추신 1.
개인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아는 게 짧고, 다른 분들이 워낙 정리를 잘하셔서 많이 적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원제를 모른 채로 영화를 보면서도 내내 ‘21세기의 내 현재보다 20세기 영화 속의 저들이 훨씬 주체적이고 능동적이고 현대적인 여성으로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주제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하는 게 두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 가장 서글프다.
추신 2.
가장 좋은 장면을 꼽기 어려운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