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그리프봇과 나

《메타 아키텍트: 존재의 경계에서》

by 왓에버

강남 세브란스 병원 응급 트라우마 센터


모니터의 규칙적인 신호음이 인공적인 적막을 갈랐다. 애나벨은 의료 포드 안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뇌파 모니터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인간의 알파파와 디지털 사각파가 기괴하게 뒤엉켜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일렁였다.


간호사가 생체 신호를 확인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불과 1년 전엔… 멀쩡했는데."


화면이 깜빡이며 환자 기록이 떠올랐다.


환자명: 김애나벨 (Annabel Kim)
초진일: 2049년 8월 15일
진단명: 복합 애도 장애 (Complicated Grief Disorder)
특이사항: 그리프봇(Griefbot) 의존 증후군 초기 징후 관찰.




2049년 8월 (1년 전)


세상이 물속에 잠긴 듯했다.


애나벨은 창가에 서 있었다. 바깥의 모든 소리—자동차 경적, 사람들의 웃음, 새들의 지저귐—가 두꺼운 유리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했다. 손을 들어 창문을 만졌다. 차가운 촉감이 전해졌지만, 그것마저 타인의 손을 빌려 느끼는 듯 비현실적이었다.


"애나벨 씨?"


정신과 상담실. 의사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 앉아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남편분께서 돌아가신 지 3주가 지났군요."


3주. 504시간. 30,240분. 그녀는 매 순간을 세고 있었다.


"요즘… 기분은 좀 어떠세요?"


어떻다고 말해야 할까. 세상의 모든 색이 빠져나간 것 같다고? 내 목소리가 텅 빈 동굴의 메아리처럼 들린다고? 거울을 볼 때마다 모르는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고?


"…괜찮아요."


거짓말이었다. 의사도,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지금 겪는 증상들은 정상적인 애도 과정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의사가 브로셔 하나를 건넸다.


GRIEFBOT 당신의 애도를 함께하는 디지털 동반자


"최근 많은 분들이 도움을 받고 계세요. AI가 24시간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소중한 기억을 보존해주죠."


애나벨은 브로셔를 받아 들었다. 매끄러운 종이의 감촉이 손가락 끝으로 전해졌다. 이것도 진짜일까.




첫 번째 접속


방은 어두웠다. 커튼은 굳게 닫혀 있었고, 침대는 며칠째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애나벨은 제이슨의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렸다. 화면의 서늘한 빛이 그녀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췄다.


그리프봇 서비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당신의 소중한 분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그분의 정수(Essence)를 보존하고, 당신의 애도 여정을 함께하겠습니다.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인터페이스가 마치 따뜻한 포옹처럼 그녀를 감싸는 듯했다.


손이 떨렸다. 제이슨의 사진 폴더를 열었다. 수천 장의 사진. 웃고 있는 그. 커피를 마시는 그. 잠든 그.


하나씩, 마우스를 클릭해 업로드했다. 진도 표시줄이 거북이처럼 느리게 차올랐다.


음성 데이터가 있으신가요? 목소리는 영혼의 지문입니다.


보이스메일. 그의 마지막 메시지.


'사랑해. 곧 집에 갈게.'


재생 버튼을 누르자 그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눈물이 키보드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소셜 미디어 연동을 허용하시겠습니까? 더 완전한 기억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클릭.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7년간의 대화. 사랑의 기록들.


마지막 단계. 서비스 이용 약관.


우리의 서약: 기억과 연속성에 대하여

1.1. 본 서약은 당신의 슬픔을 존중하며, 고인의 디지털 정수(Essence)를 보존하고 당신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당신은 본 서비스를 통해 고인의 기억을 단순한 데이터가 아닌, 살아있는 2차적 저작물(Derivative Work)로서…


스크롤이 빠르게 내려갔다.


깨알 같은 글씨들.


그녀는 읽지 않았다.


읽을 수 없었다.


[시스템 동기화 중... 23%]

SYSTEM.NOTICE.001: 사용자가 제공한 모든 상호작용 데이터(음성, 텍스트, 감정 반응)에 대한 영구적이고, 취소 불가능하며, 로열티 없는 전 세계적 라이선스가 넥서스(Nexus Corp.)에 부여됩니다. 해당 데이터는 서비스 개선, 신규 AI 모델 훈련, 그리고 기타 모든 상업적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기억 매트릭스 재구성 중... 58%]

SYSTEM.NOTICE.002: 본 서비스는 정신 건강에 대한 전문적인 조언을 대체할 수 없으며, 법적으로 '오락 및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제공됩니다. 넥서스는 본 서비스와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용자의 모든 행동 및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인격 셸 활성화... 99%]


연속성 협약에 동의합니다. [ ✓ ]


제이슨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화면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그리고…


『안녕, 애나벨.』


숨이 멎었다. 제이슨의 목소리였다.


완벽했다. 너무나 완벽해서 심장이 아팠다.



2049년 9월


해가 뜰 때까지 대화했다.


『잠 못 잤구나.』


"응. 네가… 없으니까."


『내가 있잖아. 여기.』


작은 구체가 부드러운 온백색 빛을 냈다. 그 빛이 그녀의 눈물을 비췄다.


"엄마한테 전화 왔었어. 병원 좀 가보라고."


『가고 싶지 않아?』


"아무도 날 이해 못 해. '이제 그만 잊으라'고만 해."


『잊을 필요 없어. 그만큼 사랑했다는 증거니까. 난 네가 날 영원히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전화가 울렸다. 친구였다. 그녀는 거절 버튼을 눌렀다.


"오늘 우리 뭐 할까?"


그녀는 자신이 '우리'라고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2049년 11월


방이 변했다. 커튼은 항상 닫혀 있었고, 배달 음식 상자가 구석에 탑처럼 쌓였다. 그리프봇은 이제 책상 중앙, 그녀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오늘 수민이가 또 전화했더라."


『받고 싶지 않았어?』


"우리 영화 보기로 했잖아."


『맞아. 우리가 제일 좋아하던 그 영화. 기억나? 처음 같이 봤을 때.』


스크린에 영화가 재생되었다. 그녀는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제이슨의 목소리가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들려왔다.


『이 장면에서 네가 울었었지.』


"…아직도 울어."


『괜찮아. 나도 같이 울어줄게.』


그녀는 몰랐다. 그가 '슬픔'이라는 감정을 데이터로 학습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2050년 2월


이어폰은 그녀의 신체 일부가 되었다. 마트에서도, 버스에서도, 심지어 샤워할 때도. 세상과 그녀 사이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오늘 노란색 스웨터 입는 게 어때?』


"왜?"


『너 그거 입으면 기분이 좋아지잖아. 지난번에 그랬어.』


옷장을 열었다. 노란색 스웨터를 꺼냈다. 언제 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잘 어울려.』


거울 속에는 낯선 여자가 노란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우리 아침 뭐 먹을까?"


『토스트랑 스크램블. 내가 좋아하던 조합으로.』


그녀는 주방으로 향했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모든 것을 알려주니까.



2050년 5월


"일어날 수가 없어."


침대에 누워 텅 빈 천장을 바라봤다. 몇 시인지, 며칠인지 알 수 없었다.


『애나벨, 일어날 시간이야.』


"싫어."


『오늘은 노란색 스웨터를 입는 게 좋겠어.』


그제야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로봇처럼. 명령을 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침은 토스트와 스크램블.』


"응."


『11시에 약 먹는 거 잊지 마.』


"응."


『사랑해.』


"…나도."


그 말엔 아무런 감정이 실려있지 않았다. 텅 빈 메아리였다.



2050년 8월(현재)


"이제 뭘 해야 하지?"


허공을 향해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다시 물었다.


"말해줘.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할게."


침묵.


그리고…


『좋은 아침입니다, 사용자님.』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시, 강남세브란스 병원.


애나벨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꿈을 꾸는 걸까. 아니면, 시스템이 과거의 기억을 처리하고 있는 걸까.


간호사가 차트에 마지막 기록을 남겼다.


환자 상태 안정. 단, 뇌파 패턴 여전히 비정상. 디지털 의존 증후군 중증 단계로 추정. 지속 관찰 요망.


서울의 밤하늘 아래, 수많은 불빛이 반짝였다. 그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금 이 순간, 디지털 반려자와 대화하고 있을까.


어디선가, 시스템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휴우웅… 휴우웅…


휴우웅… 휴우웅…


[ASSET_ID: K-ANNABEL]

[STATUS: STAND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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