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다. 가져온 돈이 다 떨어져 간다. 당국에서 권고한 금액은 270만 원 상당이었지만, 난 그 반절만 가져왔다.
이번 달 월세와 다음 달 월세를 미리 내고 나니 거기서 또 반절이 날아갔다.
'일만 구하다 집 가는 비행기 타는 거 아냐?'
밤을 새 가며 이력서를 작성했다. 손글씨로 써야 했기에 한 군데 넣을 이력서에도 시간이 진득이 걸렸다. 인적 사항과 학력, 경력 등을 적었다. 마지막으로 자기소개, 동기, 포부 등. 켄 씨는 드문드문 마주칠 때마다 내게 물었다.
"일은 구했어?"
"무슨 일 하고 싶어?"
나는 여태 카페나 편의점 등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종에 지원서를 넣었다. 해외에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어쩐지 메리트 있어 보였고, 무엇보다도 언어 실력이 빨리 늘 것 같았다.
2주 뒤, 아무 수확도 없었다. '도전'만 남았다. 일본의 이디야라고 이름난 도토루의 신주쿠 본사에서 면접을 봤다. 지원자가 많은 대기업이어서 그런지 면접 일정을 온라인으로 정할 수 있었다. 홈플러스 같이 큰 마트 면접과 편의점 면접도 보았다.
처음엔 수십 통의 전화 면접을 거쳐야 했다. 내가 전화 예절이나 면접 언어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또박또박 느리게 설명해주며 상냥하던 직원도 성질을 내고 그냥 끊기 일쑤였다.(상냥함의 국민 일본인을 화나게 만들었다!)
실전 일본어 공부를 수화기 너머로 한 셈이다. 결국 세 군데의 대면 면접 약속을 잡을 수 있었지만, 좋은 소식은 없었고, 시간이 흘렀다.
"이런 부분은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자연스러운 일본어는 아니야"
그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내 이력서를 훑어보았다. 유심히 읽더니 내 글을 첨삭해 주었다. 나는 켄 씨가 말하는 대로 고쳐 썼다.
"이번엔 식당 어때?"
"주방이라면 일본어를 못해도 그다지 문제없으니까"
나는 지원만 하면 뽑힐 줄 알았다. 그때까지도, 삶의 질을 위해 주말과 심야는 일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내 머릿속의 낭만적인 워홀은 그런 이미지였다. 그는 한마디 더 거들었다.
"김 군은 학생이 아니잖아? 시간이 많다고"
"식당은 주말까지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평일에는 식사하러 오는 사람이 많지 않아"
"식당에서 일하고 싶다면, 주말에도 일할 수 있다고 적어야 해"
나의 알바 구직 모토는 <일주일 7일, 주•야간을 가리지 않고 가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바로 일을 구할 수 있었다. 이방인이면서도 '워킹'과 '홀리데이'를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다.
'여기서 일한다면 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여기서' 일하려면 내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를 써야 했던 것이다. 삶의 질에 대한 미련이 깨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