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옹 근처 작은 마을에서
오베르뉴-혼-알프스(Auvergne-Rhône-Alpes) 여행1
<리옹 근처 작은 마을에서>
2월의 마지막 금요일, 나와 아내는 리옹 빠흐디유(Lyon Part-Dieu) 역을 향해 출발하는 TGV 기차에 올랐다. 2024년 새해 초, 여러 사람들과 새해 축하 인사를 주고 받으며 정신없던 와중, 리옹 근처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는 프랑스인 부부가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평소 우리와 자주 연락을 주고 받는 이 부부와는 참 인연이 깊다. 이 인연에 대해서는, 나중에 차근차근 풀어나가고 싶다.
작년 봄에 우리 집에 놀러와 사흘간 머물렀던 이들 부부는 이번에는 자신들의 새로운 집에 우리를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작년 봄에 새집으로 이사를 하고, 집을 고치느라 정신이 없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이제야 얼추 정리가 끝났다고 했다. 부부는 쭉 아파트에서 살다가, 아예 정착할 목적으로 마당이 딸린 메종(Maison)을 사서 들어갔는데, 집의 모든 부분을 다 뜯어 고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했다.
반가운 소식에 우리 부부는 곧바로 OK 사인을 보냈고, 방문할 날짜를 잡고 미리 TGV 기차표를 끊었다. 프랑스인 부부는 자신들에 함께 데려다줄 테니 어디 어디를 가보고 싶냐고 물었고, 우리는 대도시보다는 작은 마을들을 더 가보고 싶다고 했다. 이 천금같은 기회에 나와 아내는 웬만하면 한국인들이 잘 모르는, 찾아가기 힘든 곳들을 가보고 싶었다. 그들 부부도 흔쾌히 동의했다. 집 근처에 가볼 곳, 걸어볼 곳이 많다고 했다. 나와 아내는 기대감에 부풀어 갈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다.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우리는 무사히 기차를 타고 출발했다. 그 우여곡절이란, 바로 SNCF 노조 파업이었다. 프랑스 여행을 해본 사람들은 다 익히 들어봤겠지만 SNCF는 프랑스 국유 철도사다. 파업이 잦기로 유명하다. 문제는, 이들 노조가 프랑스 방학 기간에 맞춰 파업을 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프랑스 학교는 여러 번의 짧은 방학과, 긴 여름방학이 있다. 대략 6주마다 2주 가량의 짧은 방학이 있고, 7월초부터 8월말까지 긴 여름방학이 있다. 그리고 A, B, C 총 3개의 지역Zone이 있는데, 지역마다 방학 시기가 조금씩 다르다.)
나도 그렇고 프랑스인 부부 중 한 명도 학교 선생인지라, 하지만 지역Zone이 달라서, 둘이 방학이 겹치는 시기로 여행날짜를 정한 것인데, SNCF가 딱 그 시기에 파업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아내와 나는 그 뉴스를 보고 어마어마한 불안에 휩싸였다. 실제로 우리는 SNCF 파업 때문에 샤를 드골 발 한국행 비행기를 놓칠 뻔한 적도 있었기에.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출발 전에 파업은 끝났고, 우리는 아무런 불편 없이 기차로 왕복할 수 있었다. 보통 누군가의 파업에는 상당히 관대한 것이 프랑스인들인데, 이번 SNCF 파업에 대해서는 불만이 다소 높았기 때문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리옹까지는 4시간 20분이 걸린다. 기차로 4시간이 넘는 거리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시간이다. 보통 스트라스부르에서 파리까지 1시간 50분이 걸리는데, 이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리는 시간과 비슷하다. 아마도 이 정도가 일반적인 한국인이 체감할 수 있는 최대의 기차 이동 시간일 것이다. 그것의 두 배를 조금 넘는 시간을 기차타고 가는 것이다. 프랑스라는 나라의 땅덩이는 대체 얼마나 큰 것인지. 유럽 기차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들도 생각났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철로, 끊임없이 주행하는 기차, 그리고 끊임없이 타고 내리는 수많은 사람들... 실질적 섬나라인 대한민국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경험일 것이다. 유럽 기차여행은 나도 아직 못해봤지만. 아무튼 이런 저런 상상을 하다가 기차 내에서 상당히 지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리 넷플릭스로 볼 영상들을 미리 저장해두고 책도 한 권 챙겼다.
생각보다 4시간은 훌쩍 빠르게 지나갔다. 알자스의 보주Vosges 산맥과 평행하게 달리며 남쪽으로 가다보면 저 멀리 알프스 산자락의 끝이 보이고, 다시 우측으로 꺾어 달리면 크고 작은 산과 강 사이에 자리한 브장송Besançon이 나타난다. 그리고 조금 더 가면 머스타드 소스로 유명한 디종Dijon,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남쪽으로 꺾어 달리면 와인으로 유명한 마콩Mâcon을 지난다. 이쯤 오면 리옹에 거의 도착한 것이다.
바깥 풍경 구경에 넷플릭스는 켜보지도 못했고, 가져온 책도 몇 장 제대로 읽지 못했다. 한국의 지인이 우리집에 놀러와 선물하고간 책이었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문학동네, 2019. 51쪽 '추방과 멀미' 부분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여행을 하며 읽기에 아주 좋은 책이라 하겠다. 모처럼 제대로 글다운 글을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이번 여행에서 나는, 아내는, 어떤 기대에 배신 당하고, 또 생각지도 못한 것을 얻어갈까.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손에 쥘 수 있을까. 여행 이후 우리의 모습은 또 어떻게 변화해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중 마침내 리옹 빠흐디유 역에 도착했다.
예전 2019년에 잠깐 방문했을 때는 온통 공사중이었던 이 거대한 역은 마침내 공사가 마무리되어 깔끔한 모습으로 우리를 마중해주었다. 출구 근처에서 마중하러 온 프랑스인 부부 중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반가움과 기쁨섞인 비주Bisou 두 번, 왼쪽과 오른쪽 한 번씩.
차를 타고 50여 분을 이동해, 마침내 그들의 새로운 보금자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당에 차를 세우니 현관 문이 열리며 프랑스인 부부 중 아내가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물론 비주 두 번 하고. 비주는 매번 해도 아직도 어색하지만, 기뻤다. 1년 만에 다시 만난 우리 네 사람.
프랑스인 부부는 우리에게 안방을 내주었다. 우리는 너무 당황해하며 사양했지만, 그들은 꼭 우리가 안방을 써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키우는 두 마리 고양이가 이미 손님방 침대를 점령했다는 이유였다. 털은 말할 것도 없고, 밤에 갑자기 침대 위로 난입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고양이들이 문을 열 줄 알기 때문에 방문을 닫는 것도 소용 없다고 했다. 두 마리 귀여운 폭군 덕분에? 나와 아내는 고맙게도 안방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사흘 간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저녁을 먹었다. 프랑스인 부부 중 아내는 자신의 아버지 레시피라며 우리에게 맑은 부이야베스를 대접했다. 매운탕 국물 같지만 전혀 맵지 않고, 텁텁하지 않고, 아주 가볍고 깔끔한 맛의 국물이었다. 토마토가 붉은색을 냈고, 여러 채소와 생선이 뭉개질때까지 끓여, 거름망에 누르며 거른 것이었다. 익숙한듯 익숙하지 않은 맛, 여기에 바게트를 곁들여 먹었다. 바게트도 두 종류의 크림 소스를 발라 국물에 띄워 놓고, 빵이 국물을 빨아들이길 잠시 기다린 뒤 먹는 게 방법이었다.
디저트는 초코칩이 박힌 배 파이였다. Tarte aux poires Williams. 윌리엄 배를 가지고 만든 것인데, 굉장히 맛있었다. 한국 배처럼 아삭거리고 달지는 않지만, 시원한 향만큼은 한국 배와 비슷했다. 절여져 있어 몰캉하고 달콤한 맛이 일품이었다.
우리 네 사람은 수다쟁이들이다. 아닌 것 같아 보여도, 한 번 입이 터지면 멈추지 않고 계속 말들이 흘러나온다. 생각해보면 작년 봄에도 우리 네 사람은 몸은 안 피곤해도, 입이 피곤해서 다들 입술이 얼얼했던 게 생각났다. 맛있는 음식과 네 사람, 그리고 많은 수다. 그간 있었던 이야기, 음식에 대한 이야기, 가족에 대한 이야기, 내일 있을 여행에 대한 이야기, 고양이들에 대한 이야기, 참고로 고양이는 서로 남매인데, 오빠 이름은 오비완(스타워즈의 그 오비완이 맞다), 여동생은 오시리스(이집트 신화)였다. 셀 수 없이 지나가는 별 것 아닌 이야기들, 수많은 이야기들이 얽히고 설켜 별이 빛나는 밤. 리옹 근처 작은 마을에서의 첫날 밤은 그렇게 평온하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