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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Sep 30. 2020

추석이면 생각나는 '우리집'

영원한 내 자리, 가족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집안을 청소하고 흐트러진 물건을 정리할 때면 머릿속에서 이 노래 가사가 자동으로 플레이되곤 한다.

다시 깨끗해져라~ 원래의 자리로 잘 돌아가거라~ 하는 바람을 담아 불러보는 일종의 주문이랄까.

하지만 곳곳에 놓인 물건들을 움켜쥔 내 손은 갈 곳을 잃고 허공을 헤매고 있다.

도대체 이것들이 있던 원래의 자리란 어디란 말인가.

어딘가에 정리를 해두어도 며칠이 지나면 다시 가족들의 손을 타고 나와 테이블이나 방바닥을 굴러다닐 것이 뻔하고, 먼지를 닦아낸 바닥과 창틀 위로 다시 먼지가 굴러다닐 테지. 청소를 해도 흥이 나지 않는 이유다.


자고로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처음부터 제자리를 만들어줘야 물건들이 길을 잃지 않는 법이라고.

쓰고 나서 다시 제자리, 먹고 나서 바로 설거지하고 제자리, 놀고 나서 본래대로 깨끗이.

하지만 태어날 적부터(라고 변명하고 싶다!) 정리와 청결에는 도무지 소질이 없는 나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변하기는커녕, 살림이 늘수록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손톱깎이 어디 있어? 내 지우개 못 봤어? 테이프랑 가위 찾아줘!"


정리 못하는 아내, 엄마와 살아오느라 똑같은 패턴과 취향을 고수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은 마치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여기는 듯, 자신들이 쓰고 아무 데나 둔 물건들을 늘 나에게 묻는다. 집안에 붙박이로 있다고 내가 진짜 붙박이인 줄 아는 걸까. 실상 나는 나만의 반경 안에서 내 물건들을 간수하기도 벅찬 사람이다.


사진출처 unflash

큰 맘먹고 서랍들을 죄다 열거나 잡동사니를 모아 놓은 상자들을 뒤집은 날이면 적잖이 당황스럽다.

그렇게 찾았던 네가 여기에 있었구나, 너는 왜 여기에 없는 거니. 도대체 너희들의 원래 자리는 어디였니?

토라진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문채 모로 누워있는 물건들에게 말을 걸다 보면 조금은 미안해진다. 처음부터 너희들의 집을 정해주지 않은 내 탓인 것을 누구를 원망하리. 하지만 적어도 난 자유를 주고 싶었어. 너희들이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머물 곳을 정하고, 어디든 너희 집으로 삼을 수 있는 방랑의 자유.


낯선 곳들을 내 집처럼 옮겨 다니고 있지만, 그 어느 곳도 자신의 공간이 아닌 물건들을 우두커니 보고 있자니 마치 집시처럼 살아온 우리 가족 같다.



더블린에서 영어를 사용하다 보면 가끔 'house'와 'home'을 혼용하곤 한다. 우리말로 찾아보면 간단히 말해 둘 다 '집'이지만, '하우스'는 집이라는 건물, 머무는 거처 등을 표현 때 주로 사용하고 또 식구들이나 가족들을 뜻할 때도 있다. '홈’이라는 단어에도 주택이나 집의 의미가 담겨있긴 하지만 주로 '가정'이나 '고향'을 표현할 때 자주 쓰게 된다.  


어릴 때 배우던 기본적인 이 단어들의 의미를 다시 곱씹게 된 건 얼마 전에 보았던 <우리집>이라는 영화 때문이다. 순한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나는 세 명의 어린 소녀들이 '우리집'을 지키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가 참 예쁘고도 아릿했다.

열두 살 하나는 겉으로 보기엔 그럭저럭 괜찮은 '집'에 살고 있지만 막상 집안에는 마음을 둘 곳이 없다. 직장일로 바쁜 엄마와 아빠는 매일 밤마다 심각하게 다투고 사춘기 오빠는 도통 식구들에게 관심이 없다. 화목했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은 하나는 어릴 때 네 식구가 즐겁게 다녀왔던 가족여행을 다시 가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의 얘기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다.

속상한 하나의 눈에 유미와 유진 자매가 들어온다. 보호자도 없이 동네를 방황하는 두 아이가 맘에 걸린 하나는 맛있는 음식도 해주면서 동생들을 살뜰히 챙겨준다. 도배를 다니느라 바쁜 엄마 아빠가 늘 집을 비우는 유미네 가족은 이곳저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 집과 가족에 대한 결핍에 허덕이던 하나와 유미, 유진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무언가로 친자매들처럼 점점 가까워진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집>. 하나와 유미, 유진은 자신들만의 집을 간절히 바라며 종이집을 쌓는다.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우리집'이다. 네 식구가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상을 나누고 서로의 온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집. 자주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되고, 오래오래 걱정 없이 머물 수 있는 우리만의 공간.

고단한 몸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 가만히 맘을 기댈 수 있는 가족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포근한 보금자리.


어른들이 바라는 '집' 또한 다르지 않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그들에게 집은 점점 '짐'이 되어버린 듯하다. 악착같이 일하고 돈 벌어서 내 가족들을 위해 마련해야 할 무거운 책임감이자, 평생 메뚜기처럼 옮겨 다녀야 하는 고단한 운명을 깨닫게 하는 존재. 또 누군가에게는 벗어나고 싶은 굴레이기도 하다.

소녀들은 자신의 부모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이상적인 '우리집'을 찾기 위해 작은 종이상자와 색종이, 리본을 엮어 알록달록 종이집을 만들고 모험을 떠난다. 달팽이처럼 종이집을 둘러메고 바닷가를 헤매다가 찾은 작은 텐트 안에서 가장 평온한 밤을 보낸 아이들은 다음날 아침, 자신들이 바랐던 완벽한 집을 집 밖에서는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집'이란 서로를 걱정하고 이해해주는 식구들의 마음이 따스한 온기가 되어 퍼져가는 작은 찰나 같은 것이었다.

 


우리 가족이 더블린으로 건너와 낯선 집에 짐을 하나둘씩 풀고 정착하는 동안에도 섬이와 콩이 두 아이는 종종 '우리집'이 그립다는 얘기를 꺼냈다. 남편과 나는 결혼 후, 1년, 2년, 6개월마다 이사를 전전했다. 섬이가 세 살이 되던 무렵 장충동의 한 빌라로 이사를 했는데, 감사하게도 그곳에서 콩이를 낳은 후 더블린에 오기 전까지 7년 동안 한 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아이들이 말하는 우리집은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냈던 장충동의 그 집이었다.

오래되긴 했어도 네 식구 살기에 꽤 널찍하고 아늑했던 그 공간에서 두 아이는 기고, 걷고, 뛰고, 울고, 웃으며 참 많은 추억들을 쌓았다. 아랫집에 사는 고 3 수험생에게 방해가 될까 봐 매일 뛰지 말라고 아이들을 다그치고, 여름이면 밤마다 모기에게 뜯기고 겨울에는 사나흘씩 수도가 얼어서 남의 집에 피신을 가야 했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에게는 미워하거나 원망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우리가 떠난 후 완전히 새롭게 리모델링을 하고 다른 가족이 버젓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는데도 아이들은 종종 구글맵으로 옛 동네를 찾아내고는 아장아장 오고 가던 길목과 작은 슈퍼, 약국, 놀이터를 쭈욱 돌아보곤 했다.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다시 가볼 수 없을 테지만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그곳이 '우리집' 하면 제일 먼저 마음에 떠오르는 마음의 고향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녀석들의 추억찾기를 방해하지 않는다.


나에게 우리집, 하면 떠오르는 공간은 아홉 살부터 스무 살까지 살았던 초록색 대문 집이다. 여름이면 장독대 사이로 환한 장미 덩굴이 피어오르던 작은 마당과 할머니가 옥수수, 토마토를 심고 가꾸던 널따란 옥상이 있었던 2층 양옥집.

매년 설날과 추석이면 신발이 놓을 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친척들이 찾아와서 푸짐한 음식들과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낯에는 마당에서 편을 갈라 요란스럽게 윷놀이를 하고 밤이면 옥상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환한 달을 구경했던 시끄럽고 아름다운 추억들이 그득했던 집.

작년이었나, 한국에 사는 친구가 어릴 적 내가 살던 그곳을 다녀왔다며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그때는 넓게만 보였던 골목은 커다란 차들로 가득하고, 오래된 양옥들은 새로 지어진 빌라들로 모두 바뀌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소중한 공간을 잃어버린 것 같아 잠시 속상했지만, 섬이와 콩이처럼 나 역시 마음의 고향으로 남겨둘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이십년도 더 지나고나서야 깨달았다.




몇 주전, 언니가 서울에서 큰 수술을 받았다. 자가격리 때문에 한국에 가볼 수 없는 나는 그저 더블린에서 마음을 졸이며 전화와 문자로 안부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수술을 잘 마친 언니는 당분간 안정과 휴식을 취하기 위해 조카들과 형부를 집에 남겨두고 엄마와 동생이 있는 친정으로 퇴원을 했다.

나이를 먹어도 아프고 힘들 때 가장 편하게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이가 엄마뿐인 것은 변하지 않는지, 평소에는 아이들과 남편을 먹이고 챙기느라 분주하던 언니는 엄마 곁에서 평온한 시간을 잘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로 많이 좋아졌다는 엄마와 언니의 목소리를 차례로 들으며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제자리'에 잠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며칠 전에는 추석을 앞두고 엄마와 언니, 동생이 함께 아빠를 모시고 있는 산소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언니가 보낸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보는데, 더블린에 온 후 아빠 묘소의 사진을 처음 받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 없이 원래의 우리집 식구가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고 생각하니 조금 샘도 나고, 갈 수만 있다면 쏜살같이 날아가 엄마와 아빠, 그리고 우리 삼 남매가 함께 있는 그 곁에 나도 가만히 머물고 싶었다.


절대 결혼 안 하고 나랑 영원히 살 거라던 언니가 이십 대 중반에 훌쩍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속으로는 배신감에 부르르 떨었다. 서른 살이 되어 나 역시 결혼을 하게 됐을 때는 마음이 참 이상했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우리집을 이제는 떠나고 싶으면서도 또 다른 우리집을 잘 만들어갈 수 있을지 두려워 걸음을 떼기가 싫었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와 할아버지,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우리집이 영원한 건 아니었구나'

언제든 돌아보면 그곳에 있을 줄 알았던 사랑하는 사람들과 추억이 가득했던 그 공간들은 이제 더 이상 내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자리에 남아 하나하나 가족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봄이면 벚꽃을 보러 오라고, 김장 때면 김치 얻으러 오라고, 명절이면 맛있는 음식 나누자고 우리들을 부르던 엄마는 한 번도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적이 없었다.


자고로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처음부터 제자리를 만들어줘야 물건들이 길을 잃지 않는 법이라고.

내 마음이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엄마는 항상 저만치서 손짓을 하고 있었다.


괜찮으니 언제든 힘이 들면 돌아와.

내 옆, 네 자리, 우리집으로.

올 추석에도 내 마음은 엄마 곁으로 가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풍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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