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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Oct 24. 2021

먼지처럼 가볍게 살긴 글렀다

찐득함과 진득함에 대하여



아일랜드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지 벌써 열 달이 다 되어간다. 그사이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어질러진 방을 치울 생각이 없는 사춘기 아이처럼, 어느 땅에도 발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유랑민처럼 마음은 늘 공중에 떠있는 것 같았다.

더블린에서도 지낸  1년이 지났을 무렵에서야 처음 무언가를 끄적일 용기가 겼듯 아마 한국에서 제대로 적응을 하는데도 사계절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그렇지만 몸도 마음도 여전히 녹록지 않다.


작년 12월,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여권을 훑어보던 공항직원이 내게 물었다.

“2016년 6월 이후 한국에는 처음 온 건가요?”

지극히 무심한 그 말투가 긴 비행으로 지친 나의 어딘가를 툭 건드렸다. 떠날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이 짐을 싸고 집을 정리하고 친구들과 쫓기듯 작별인사를 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서 흐르는 듯했다. 더블린 공항에 와서는 가방의 무게 때문에 정든 책들을 한가득 버리느라 난리를 피운 일이 불과 하루 전의 일이었다.

거의 텅텅 비어 있어서 더 을씨년스러웠던 비행기 안에서 10시간 넘게 한숨도 자지 못하고 한국으로 오느라 정신은 그야말로 공황상태에 가까웠던 내게 직원의 질문은 "마침내 현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말처럼 들렸다.


방역 택시 창문 너머 미세먼지로 뿌옇게 번진 노을을 보면서 나에게 다시 되물었다. 왜 5년 동안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은 걸까. 네 식구가 오고 가는 비용이 부담스러운 이유가 제일 컸지만 실은 두려워서였다.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까 봐.

혹은 빨리 아일랜드로 돌아가고 싶을까 봐.'


그 어떤 이유도 나를 무척 난감하게 만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아무 볼멘 소리나 투정도 내뱉을 수 없는 상황, 즉  반드시 돌아와야만 하는 현실이 옴짝달싹 못하게 붙잡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순순히 돌아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쩌면 주어진 환경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며 살아온 가장 나다운 선택이기도 하다. 덕분에 지금은 아일랜드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과 한국 생활이 주는 편안함을 이처럼 적절히 만끽하고 있지 않은가.




2주간의 자가격리가 끝나자마자 그날 자정부터 4인 이상 집합 금지가 시작되었다. 엄마와 동생, 언니를 보기 위해서는 나름 조를 짜야했다.

딸아이와 둘이서 제일 먼저 친정을 찾았을 때 나는 비행기가 아니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온 줄 알았다. 어쩌면 내가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지,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볼수록 탄성이 더해졌다.

섬이와 콩이가 아가 적부터 외할머니 집에 가면 덮고 잤던 꼬마버스 타요 이불, 뽀로로 양치컵도 그대로였고, 탁상 위에 놓인 달력도 5년 전에 멈춰있었다. 날짜 옆에는 딸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찍었던 사진들 속에서 앳된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양문이 아닌 옛날식 외문 냉장고, 수없이 밥과 국을 담아 먹었던 오래된 그릇과 숟가락, 파란 물컵, 그리고 투박한 통나무 식탁과 그 위에 가지런히 놓인 엄마의 약통들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20년도 더 된 것 같은 엄마의 보라색 드라이어 사이에 낀 먼지와 같은 시간을 보낸 세월의 이끼들이 집안 곳곳에 촘촘하게 쌓여 있었다.


"엄마 이 컵 왜 안 버렸어? 이젠 뽀로로 좋아하는 아가도 없잖아."

"그거 안쪽이 스테인리스라서 쓰기 좋아. 튼튼하고."


엄마의 대답이 반은 거짓이고 반은 진실이라는 것을 알지만 짐짓 모른 채 한다. 항상 주변 사람들을 챙기느라 분주했을 엄마가 집안을 쓸고 닦는 일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을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어떤 먼지들은 털어도 닦아도 다시 그 자리에 내려앉곤 한다. 언제부턴가 그 자리에는 단순히 삶의 묵은 때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흔적과 함께한 추억, 크고 작은 아픔과 기쁨들이 쌓이고 눌어붙기 시작했으리라.

그 후부터 한동안은 친정에 드나들 때마다 너무 오래되었거나 유통기간이 지난 물건들을 몰래몰래 버리기도 하고 구석에 숨어있는 찐득한 먼지들을 쓱쓱 닦아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손을 멈추고 이내 깨달았다.

먼지란 후~ 불거나 툭툭 털어내면 어디론가 흩어져야 하는 법이지만, 엄마의 공간에 자리 잡은 것들은 이제 더 이상 먼지가 아니라 그녀의 삶에 달라붙은 표피와도 같았다.

자신은 물때 묻은 컵과 색 바랜 그릇들을 쓰는 것이 당연하지만, 손님들을 위해서라면 장식장 안에 예쁜 그릇들은 고이 아껴두었던 것처럼, 낡은 만큼 익숙해진 물건들은 엄마의 취향과는 상관없이 그저 그녀의 삶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일랜드의 민속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옛날 그릇들



나는 가볍고 싶었다.

결혼 후 10여 년간 사용했던 대부분의 물건들을 버리고 아일랜드로 떠날 때부터 미련이란 것을 버리는 법을 배웠고, 아일랜드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숟가락 하나, 컵 하나를 살 때도 5년 후면 다시 두고 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쉽게 정을 주지 않았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람이든 글이든 누구에게 집착하거나 매달리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렇게 훌훌 털고 가볍게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믿었다.

'내 집'이 아닌 공간에서 단 몇 개의 '내 것'을 가지고 시작한 새로운 생활인만큼 미니멀하고 쿨하게 이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착'과'가벼움'이라는 단어 사이의 간극을 줄이기란 쉽지 않았다. 생활 반경이 넓어지고 같은 일상이 반복될수록 소유하고 싶은 물건과 바꾸고 싶지 않은 삶의 패턴들은 늘어만 갔다.


슬슬 한국에서의 편안함과 익숙함에 몸이 노곤해질 무렵, 예전에 오고 가던 서울 중심가를 다시 찾았다. 더 많아진 아파트와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몸통을 불린 빌딩들 사이에서 휘둥그레진 내 눈은 마치 촌사람처럼 갈 곳을 잃고 말았다. 어딘가 숨을 고를 여백의 공간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남편과 나는 오래된 우리의 아지트를 찾아 숨어들었다. 사직동 좁은 골목에 자리한 '커피 한잔'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의 로스팅 과정부터 미묘한 맛의 차이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고민하고 있는 예민한 주인아저씨도 그렇고, 창문 사이로 드리우는 작은 햇살과 그 안에서 음미하는 커피 향도 예전 그대로여서 우리를 안도하게 했다.

사직동, 우리의 아지트 커피 한 잔.


얼마 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살았던 동네를 찾아갔다. 빽빽한 아파트 숲이 즐비한 서울 여느 곳과 달리 여전히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오래된 빌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골목을 거닐며 아이들은 추억놀이에 빠졌다. 집 앞 구멍가게며, 미용실, 철공소들도 모두 그대로 있었다.

"와! 다 기억난다. 우리가 이사 와서 처음 갔었던 돼지갈빗집이 아직도 있네!"

지금은 다른 사람의 집이 되어버린 옛날 우리집 앞에서 찰칵 기념사진을 찍은 아이들은 서울에도 이렇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에 마냥 신기해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남편과 나 역시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남아있는 무언가를 찾으며 묘한 희열을 느끼곤 했다. 이를테면, 단골 중국집과 평양냉면집에서 예전의 맛을 그대로 맛보았을 때라든지, 라디오에서 배철수, 한동준, 허윤희와 같은 DJ의 친근한 목소리가 아직도 들려올 때면 진정한 평온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을까, 바삐 변하는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 성실히, 묵묵하게 제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의 그 진득함에 대해 묵상하는 밤이 많아졌다.

먼지처럼 가볍게 훌훌 거리며 살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아주 오래전부터 끈끈한 거미줄에 연결되어 있는 내 모습도 비로소 보였다.

그 줄을 통해 이어져온 찐득한 인연과 관계들이 답답하게 나를 옭아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 쉬게 했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지난 주말에는 언니와 친정을 찾았다. 우리 둘은 환상의 한 조가 되어 짐 정리를 시작하는 엄마를 몰아붙였다. 버릴까, 말까 망설이는 두꺼운 솜이불과 유행이 한참 지난 옷들, 날짜가 한참 지난 식품들과 있었는지도 몰라서 손이 잘 안 가던 물건들을 가차 없이 처리했다.

몇 달 전 엄마는 급작스럽게 이사를 결정했다. 아주 오래전에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살고 싶어서 지어놓은 먼 시골집으로 이제야 갈 용기가 생겼다고 하셨다. 집을 팔기까지 여러 번 마음이 갈팡질팡했지만 막상 계약을 끝내고 난 엄마는 더없이 홀가분해보였다.

닦아낼 수 없을 것 같았던 엄마의 먼지들은 결국 이사가 해결책인 셈이었다.

“그 뽀로로 컵은 가져갈 거야. 버리지 마.”

그래도 모두 사라질 순 없을 것이다. 많은 것을 버리고 나눠줘도, 이미 엄마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어떤 것들은 결코 떼어낼 수 없음을 언니도 나도 인정해야 했다.


우리 네 식구도 이제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를 준비해야 한다. 열 달 한국 생활로 무섭게 늘어난 저마다의 짐들과, 새집에서 필요할 물건의 리스트를 떠올리다 보니 벌써부터 몸도 마음도 무겁다.


그럼 그렇지,

나도 먼지처럼 가볍게 살기는 글렀다.

광주 펭귄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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