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면의 추억
즐겨 듣는 팟캐스트의 오디오 매거진이 있습니다.
평소처럼 설거지하면서 방송을 듣는데 '비대면의 추억'이라는 주제로 독자들에게 글을 보내달라는 내용이 흘러나왔습니다. 벌써 4~5년은 지나버린 팬데믹의 시절. 많은 것들이 제한되고 가로막혔던 그때 어떤 추억들이 있었지, 하며 생각에 잠기다 보니 어느덧 저는 지구 반대편의 Dublin 18에 와 있었습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친구에게 편지를 쓰듯이 그 시절의 추억을 쏟아냈습니다. 참 오랜만에 써보는 긴 글 덕분에 한동안은 서울 하늘을 벗어나 너른 잔디를 떠돌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 팟캐스트에 소개된 제 글을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듣다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암울했던 그 시절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맛보았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미안하고, 또 감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냥 일기처럼 이곳에 다시 남겨봅니다.
얼마 전 중학생 딸아이가 “엄마 이거 봤어?” 하면서 호들갑스럽게 저를 불렀던 적이 있어요. 친구들과 놀다가 각자의 이름을 구글에 입력해 봤는데, 코로나 시절, 자신이 찍었던 동영상이 유튜브와 어떤 사이트에 올라와서 깜짝 놀랐다는 것이에요.
코로나가 시작되고 그 사태가 절정에 달하던 시절, 저희 가족은 아일랜드에 거주하고 있었어요. 학교는 물론, 식당과 레스토랑, 펍도 모두 문을 닫고 반경 5km 이내로는 이동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제약이 심하던 그때, 아이들은 꽤 오랜 기간 학교에 가지 않고 나름 꿈같은 방학을 보냈었죠. 저희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매일 비대면 수업을 하지는 않았어요. ZOOM으로 선생님과 아이들이 만나는 것은 1~2주에 한 번 정도였고요. 선생님들이 매일 아침마다 온라인으로 그날의 공부할 내용이나 단기 프로젝트를 과제로 내주면 그것을 각자 작업해서 온라인으로 반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리고, 아이들과 선생님이 서로 피드백을 해주는 형식이었어요.
그때 마치 홈스쿨링을 하듯 아이와 같이 공부도 하고, 실험도 하고 동영상도 찍으면서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어느날은 곤충에 대한 프로젝트가 과제였는데, 아이는 꿀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도화지에 벌집 모양의 공간을 10개 만들어 내용을 쓰고 동영상을 찍었답니다. 저와 친하게 지내던 헬렌 할머니에게 그 영상을 보여줬는데, 마침 그 할머니의 아는 분이 ‘Green Foundation’이라는 생태, 환경과 관련된 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이 영상을 보고 나서 자신들의 ZOOM 모임에서 사용해도 되겠냐고 연락이 온 거예요. 때마침 꿀벌과 환경에 대한 비대면 세미나를 진행하는데, 저희 아이의 영상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었죠.
그때 사용되었던 꿀벌 영상이 온라인에 아직도 남아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느덧 한국으로 돌아온 딸아이가 그것을 친구들과 발견하고는 이빨 빠진 자신의 모습에 매우 놀란 모양이었어요.
‘비대면의 추억’이라는 주제를 들으면서, 코로나 시절에 찍었던 꿀벌 영상을 비롯해 어느새 옅어져 버린 그 시절의 추억들이 마구마구 밀려오기 시작했답니다.
아일랜드의 날씨는 ‘비가 오거나 비가 오려하거나 비가 온 후거나’일 때가 대부분인데, 신기하게도 코로나 기간에는 햇살이 굉장히 좋았어요. 아일랜드는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고, 세계에서 1인당 개인 사용 면적이 매우 넓은 나라라는 기사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요. 저희가 살았던 집 주변에도 널따란 잔디밭이 많았고, 코로나이긴 해도 강아지들과 아이들은 밖으로 뛰어나와 놀기 좋은 그야말로 천국이었죠.
물론 뉴스에서는 감염자들의 소식과 소상공인들의 어려운 이야기들이 가득했지만, 날씨는 좋고, 기약 없이 학교에 안 가는 아이들은 그저 행복했어요. 다만 밖에서도 4인 이상은 모이면 안 되고, 서로 2m의 간격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서로를 빙빙 돌며 배회하긴 했지만요.
아일랜드 사람들은 정말 말이 많답니다. 집에서 파티를 하거나 모임을 가지면 와인이나 티에 음식을 조금 깔아놓고는 하루 종일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떠드는 것이 일이에요. 저와 친했던 그 헬렌 할머니의 경우, 하루에도 ZOOM 스케줄이 너무 많아서 바쁠 지경이었는데요. 저마다 편안한 자리에서 와인 잔이나 커피 잔을 들고 온라인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었어요.
아일랜드의 많은 집들은 돌이나 나무로 된 담 하나로 옆집과 구분되어 쭈욱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각자 자신의 마당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옆집 사람과 수다를 떠는 분들도 많았죠. 하루는 기동성 좋은 헬렌 할머니가 저희 집 근처로 찾아오기도 했어요. 인근의 넓은 잔디에 할머니가 가져온 휴대용 의자를 2m 간격으로 놓고, 제가 집에서 내려온 커피를 마시면서 마주 보며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간 적도 있어요. 오시는 길에 그 할머니의 친구분들이 손수 천으로 만든 마스크를 제게 전해주시기도 했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삭막한 서울의 아파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조금은 촌스럽지만 따뜻한 추억들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저희 아이들이 가장 아쉬워했던 것은 ‘축구’였어요. 저희 동네에는 매주 화요일 저녁 6시마다 아이들의 축구 경기가 열렸는데요. 거의 10년 넘게 동네의 ‘짐 Jim’이라는 할아버지가 손수 골대를 세우고 심판을 봐주시면서 경기를 운영하고 계셨죠. 처음 동네로 이사 와서 친구도 없고 적응도 못하던 저희 아들과 딸에게 그 축구경기는 너무나 좋은 이벤트였어요.
시간이 되면 저마다 소중히 여기는 다양한 축구 유니폼을 입고 비장하게 잔디밭으로 나갔어요. 그날그날 모인 아이들이 조금씩 달랐는데요. 실력에 맞게 팀원을 나누는 것도 짐의 몫이었어요. 운동신경은 둔하지만 나름 몸집이 큰 저희 아들에게는 골키퍼를 시키기도 했고, 몸집이 작은 딸아이가 남자아이들 틈에서도 기죽지 않도록 많은 배려를 해주셨죠. 어쩌다가 골이라도 한 번 넣은 날은 완전 축제 분위기였고, 비가 많이 내려서 축구 경기가 취소되는 날이면 저희 애들 눈에서도 비가 내렸어요.
코로나 때문에 이 축구 경기가 중단된 것은 우리집 아이들을 비롯하여 동네의 꼬마들에게는 너무 슬픈 일이었어요. 아이들과 저는 셋이서 동네 잔디밭에 나가 이따금씩 공을 튕기며 쓸쓸한 연습을 하곤 했어요.
그러던 중, 친한 이웃으로부터, 짐 할아버지께서 암으로 투병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축구를 할 수 없는 것보다 더 슬픈 소식이었죠. 코로나 때문에 5분이면 갈 수 있는 짐 할아버지의 집에 문병도 못 가고, 그저 건너 건너 소식만 들으며 시간은 흐르고, 어느새 저희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때가 찾아왔어요.
다행히 아일랜드의 코로나 상황이 조금씩 좋아져서 4인 이상도 함께 모일 수 있게 되었지만 축구 경기가 다시 열리지는 못했어요. 떠나기 전 날, 동네 아이들과 저희 가족은 무리를 지어 짐 할아버지 짐을 찾아갔어요. 조금은 야위셨지만 다행히 거동하실 수 있었던 할아버지에게 그동안 저희 아이들을 사랑해 주셔서 너무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잊지 못할 사진도 찍었답니다.
아일랜드를 떠나는 날 새벽, 동네 여자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전 저희 집에 찾아왔어요. 그리고 축구를 좋아하는 딸아이와 10분 정도 집 앞에서 축구공을 가지고 놀다가 단체로 와락 끌어안고는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때 2층 창문에서 말없이 그 영상을 찍던 남편이 흘리던 눈물방울이 아직도 영상이 남아있네요.
그렇게 2020년 겨울, 저희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따금씩 아일랜드 친구들과 소식을 주고받으며 시간이 흘러갔어요. 그러다 다음 해 가을쯤 되었을 때, 아일랜드 연락이 왔어요. 짐 할아버지가 곧 떠나실 것 같다고, 마지막으로 영상통화를 할 수 있냐고요. 하지만 시차가 너무 다르고 할아버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결국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한 채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만 전해 듣게 되었답니다.
지금도 가끔 저희 가족은 아이들이 뛰놀던 아일랜드의 그 잔디밭과, 짐 할아버지와 찍은 사진을 꺼내보곤 한답니다. 어느덧 4년이 지나고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할아버지의 죽음도, 그곳에서의 추억도 실감이 잘 나지 않는 것 같아요. 가끔은 서로 얼굴과 얼굴을 직접 마주할 수 없었고, 손을 잡을 수 없었던 코로나 시대의 그때처럼 직접 만날 수 없을 뿐이라고, 친구들이 지구 반대편에 있듯, 할아버지도 우주 반대편 어딘가에 계시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해요.
저희 아이들은 유난히 햇살이 빛나던 그 코로나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친절한 사람들과 주고받은 따스한 정과, 가슴 한 편을 저릿하게 했던 깊은 여운이 왼쪽 가슴 아래쯤에 평생 머물 것만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