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섬콩 Feb 03. 2021

'처음'이라는 씨앗

더블린에서 쓴 마지막 일기

한국에 돌아온 지 어느새 두 달이 다 되어간다.

2주 간의 자가격리가 끝난 지도 오래고, 밤낮이 뒤바뀌어 고생하던 시차 적응도 일찌감치 마쳤는데 여전히 낮에는 몽롱하고 밤에는 이곳저곳을 서성이며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삶을 열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실행해야 할 것들, 핸드폰을 개통한다거나 전입신고를 하고 은행 카드를 살리고 공인인증을 재발급받고 건강보험 납부를 다시 시작하는 등의 현실적인 일들을 해결하느라 그동안 몸과 마음은 정신없이 분주했다. 처음 더블린에 갔을 때처럼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부유하듯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영화 한 편, 책 한 권조차 맘 편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따금씩 정신을 놓고 창문 앞의 아파트 숲을 하염없이 응시하다 보면 어느새 잿빛 하늘 저 너머의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두고 온 것도 다시 가야 할 이유도 없는데, 5년 동안 머물렀던 더블린 18의 34번지 골목 주변을 서성이는 날이면 아이들과 그곳의 사진을 꺼내보기도 했다.

낯설고도 익숙한 한국에 왔다는 것이 실감나는 집 앞의 아파트 숲 풍경

며칠 전에는 엄마의 글을 읽고 싶다는 딸아이에게 더블린에서 마지막으로 썼던 일기를 보여주었다. 생각해보니 무언가를 마지막으로 끄적인 것도 벌써 두 달 전 일이었다.

조곤조곤 엄마의 일기를 읽던 아이는 어느새 소리를 낮추고 눈으로만 글자를 쫓다가 이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사실 그리 슬픈 이야기도 아닌데 몇 달 사이 그 모든 일들이 '그리움'이 되어버렸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는 서글피 흐느꼈다. 아이의 울음은 깊어지는데, 그 작은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갈 수많은 추억들이 기특해서 오히려 나는 행복했다. 꺼낼 때마다 울고 웃을 기억들이 두고두고 남았으니 얼마나 넉넉한 부자인가.

나 역시도 무언가를 끄적이기보다는 옛이야기를 뒤적이는 날이 한동안은 계속될 것만 같다. 붕붕 뜬 발이 현실이라는 땅에 비로소 닫게 될 쯤이면 내 시선도 마음도 다시 돌아온 이곳의 반경 안에 편안히 머물 수 있지 않을까.


아이에게 보여줬던 그날의 일기를 다시 꺼내본다.




‘처음’이라는 씨앗          


지난 주말, 우리 집 창문에서는 작은 ‘프리마켓’이 열렸다.

5년 동안의 ‘아일랜드 살이’가 끝나가는 요즘, 우리 가족은 가져갈 것과 버릴 것, 그리고 나누어줄 것들을 정리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곳에서의 추억이 몽글몽글 담긴 물건들을 끌어안고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젓던 딸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설득 끝에 기특하게도 장난감과 책, 작아진 신발과 인라인 스케이트, 모자, 옷 등을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최근 아일랜드는 COVID19 때문에 집에서 작은 모임을 갖는 것도 허용이 되지 않는 상황인지라, 우리는 마치 작은 숍처럼 창문 앞에 물건들을 쭈욱 진열하고는 집 앞으로 아이의 친구들을 부르기로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하나둘 모여든 아이들은 창문 틈으로 물건을 살펴보며 저마다 맘에 드는 것을 고르기 시작했다. 제법 소문이 났는지 남자아이들까지 우르르 몰려와서 마켓은 나름 호황을 이루었다. 친구들과 창문을 사이에 두고 한껏 들뜬 딸아이는 어느새 자기가 쓰고 있던 물건까지 가져와서는 마구 퍼주고 있었다. 환한 그 얼굴을 보니 5년 전 처음 이 집에 살기 시작했던 때가 떠올랐다.      

    

우리의 첫 아일랜드는 환한 여름이었다. 낯선 더블린의 남쪽 동네에 캐리어 몇 개만 달랑 들고 들어선 네 식구는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지금처럼 집안에 격리되어 지냈었다. 마침 여름 방학이라 아이들은 학교에도 갈 필요가 없었고, 몸에 착 감기지 않는 까슬까슬한 새 이불처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설레면서도 생경해서 나름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집 밖에서는 이른 아침에 뜬 해가 밤 열 시가 되어서야 질 때까지 성별과 나이 구분 없이 동네 아이들이 뛰어나와 신나게 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놀고는 싶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차마 밖으로 나설 용기가 나지 않던 딸아이는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아이들을 구경하는 것이 매일의 일과였다.

하루는 맨땅에서 덤블링을 하는 언니들이 너무 신기했던지 아이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와우!” 하고 커다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창밖에서 그 소리를 들은 십대 소녀 서넛이 그제야 딸아이를 발견하고는 우리집 창가로 다가왔다.

“So cute! how old are you?”

아무 대꾸 없이 그저 손가락 여섯 개를 들어 보이며 수줍게 웃는 동양소녀에게 언니들은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을 해댔다. 발갛게 상기된 아이는 “엄마 나 어떡해?” 하며 내게 달려오더니, 그나마 조금 영어를 할 줄 아는 열 살 오빠를 대동하고서 드디어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날 해가 질 때까지 온 동네를 뛰어다닌 두 아이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집에 돌아왔다. 한국에서 영어를 조금 배운 아들 녀석이 몇 마디 알아듣고 대꾸를 한 것이 신기했던지 동네 아이들이 칭찬을 해줬다고 아이는 우쭐댔다.     


아이들의 친절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 누군가 누르는 초인종 소리에 나가보니 현관 앞에 어제 보았던 소녀들이 서 있었다. 한 아이의 손바닥 위에는 동그란 접시가 놓여 있었는데, 먹음직스러운 브라우니와 그 위에 아일랜드 국기와 태극기가 옹기종기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Welcome to Ireland!”

우리에게 접시를 내밀며 환영의 인사를 건네는 소녀들의 깜짝 이벤트에 그만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직접 빵을 굽고 손수 국기를 만들어 붙인 그 정성은 우리 가족이 아일랜드에 온 지 한 달 만에 받은 최고의 환대였다.          


하지만 허니문처럼 달콤한 날들만 계속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드디어 더블린의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아이는 슬슬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동네의 또래들과 친해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영어가 서툴고 키가 작다고 대놓고 놀려대는 아이들도 있었고, 오늘은 잘 놀다가도 다음날에는 등을 돌리는 변덕스러움에 가끔씩 상처를 받기도 했다.

외롭고 속상하다고 펑펑 울어대는 아이를 안고 여러 번 위로를 하다가도, 너무 화가 나는 날에는 폭언을 퍼부은 아이의 엄마를 찾아가 하소연을 하고 직접 그 아이에게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쨍하게 맑은 날, 비바람 몰아치는 날, 솔솔 순풍이 부는 숱한 날들을 거치며 아이는 단단하게 여물어 갔다.     

그동안 미운정 고운정이 많이 든 동네 친구들과 꼬꼬마 시절이던 그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6개월 동안 학교에 가지 못했던 올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 그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초인종을 눌러대는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친구들과의 사이가 한창 무르익을 이 타이밍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다니, 속상함에 아이는 또다시 눈물을 쏟아내야 했다.   

이제 얼마 후면 아일랜드를 떠난다는 소식에 동네 아이들과 엄마들도 무척 서운해했다. “너희 가족이 떠나면 우리 아이는 정말 슬플 거야. 너희 딸은 이 동네에서 정말 ‘Best girl’이야.” 가끔 내가 만들어주던 김치를 좋아하던 찰리 엄마의 말은 내 마음에 뭉클하게 남았다.

오픈 마켓이 열리던 날, 창문 밖에서 딸아이의 물건을 이것저것 고르는 아이들 틈에서 이런 목소리도 들려왔다.

“너를 추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네 물건을 간직하고 싶어.”

지난한 시간을 거쳐 마침내 친구들의 진한 고백을 받은 딸아이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첫은 항상 죽는다. 첫이라고 부르는 순간 죽는다.”는 어떤 시의 한 구절처럼, ‘처음’이라는 단어는 내뱉는 순간에 가장 생생히 살아 있다가 그 울림이 끝나면 곧 소멸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첫’은 작은 씨앗처럼 우리 삶 속 어딘가에 떨어져 있었다. 씨앗은 곧 그 형체가 사라지고 썩어버리지만 시간 속에서 조용히 작은 싹을 틔워 갔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뿌리를 내린 수많은 ‘첫 씨앗들’이 아일랜드의 뜨거운 햇살과 험한 비바람을 용케 견디는 사이, 우리 가족은 향긋한 꽃내음도 즐기고 추억이 방울방울 담긴 열매들도 담뿍 얻을 수 있었다. 가방 몇 개에 거의 빈손으로 아일랜드에 왔던 아이가 그 소중한 열매들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떠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보다 더 큰 수확은 없을 것 같다.    

투명한 창문 안에서 두려움에 망설이던 앳된 소녀는 이제 또다시 새로운 환경에 발을 내디뎌야 한다. 다행히 그때보다 키도 서너 뼘 자랐고 마음도 더 넉넉해졌으니 어떤 씨앗이든 예쁘게 잘 틔워낼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곁에서 그 소중한 ‘첫’을 늘 응원하고 싶다.




* 이 글은 웹진인 '투룸 매거진 1월호'에 실렸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