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사유 # 에피소드 1
"언니 나.. 그 사람이랑 사귀어."
작년 겨울 이맘때쯤, 오랜만에 만난 대학 때 후배 H가 잘못이라도 고백하듯이 망설이며 말했다.
H는 매년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했던 솔로 동지였다. 한 번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호캉스를 함께 갔다가 온통 연인들 속에서 우리만 유일하게 친구인 다소 곤혹스러운 경험을 한 적도 있다. 로비에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던 그 호텔은 세계적인 호텔 체인의 가장 저가 라인 브랜드 호텔이었다. 방음이 잘 되지 않아서 광란의 밤을 보내는 사람들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성 속에서 귀를 틀어막고 잠을 청해야 했다. 크리스마스에는 그냥 집에 있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다음날 아침, H는 내년에는 방음도 잘 되는 더 좋은 호텔을 가자며 너스레를 떨어 나를 웃게 했다.
그런데 재작년 크리스마스이브는 H와 함께하지 못했다. 그녀가 덜컥 코로나에 걸려버렸기 때문이었다. 혼자 보낼 쓸쓸한 연휴가 아쉬웠지만 방 안에서 홀로 아파할 H의 처지가 더 짠하게 느껴져 평소 좋아하는 진한 초콜릿 크림이 듬뿍 든 롤케이크를 선물로 보냈다.
그렇게 연말을 각자 보내고, 해를 넘겨 오랜만에 만난 H였다. 여전히 추운 한겨울이었다.
축하받아 마땅할 일에 눈치를 보며 짐짓 미안해하기까지 하는 것 같은 H는, 내가 어떤 마음일지를 어쩌면 미리 읽은 것이었을까? 누구보다도 서로의 외로움을 잘 알기에 있는 호들갑 없는 호들갑 다 떨며 내 일인 양 기뻐해 주어야 마땅하거늘. 당황스럽게도 출처가 불분명한 서운한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게 아닌가.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건네는 말투나 표정이 전혀 그 소식을 반가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 순간 나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게밖에 반응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싫기도 하고 H에게 미안했지만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저 겉모양만 축하 형태인 뜨뜻미지근한 말을 건넬 수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만난 성수동의 동남아시아 음식점은 그 해 여름 내게도 존재했던 썸남과 방문한 적이 있던 곳이었다. 내가 마음이 없어서 끝났던 그 관계는, 내겐 아무렇지도 않은 기억이었다. 그래서 그저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으로 기억되는 그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약속 장소로 골랐다.
그곳에서 H는 내게 어떻게 해서 연인을 만나게 되었고, 어떤 면에서 그가 H의 마음에 들었는지, 어떤 면이 통해서 좋고,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또 그녀가 얼마나 행복한지 등을 이야기했다.
H의 연애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하나도 집중하지 못했다. 요약해 보면 '나만 혼자 남았다'는 생각을 내내 속으로 읊조렸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내게도 있었던 여름날의 찝찔하고 미지근했던 설렘의 기억을, 익숙한 음식점의 인테리어와 음식 맛 속에서 찾아 헤매었다.
만남의 끝에 나는 진심으로 그녀의 연애 소식을 축하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H는 서운한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그런 나를 걱정하며 위로해 주었다. 그리곤 '언니가 심심할 때면 언제든 연락하고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며, 해석해 보면 '연애를 해도 우리의 우정이 전과 달라질 것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다. 그 말은 나와 그녀의 상황의 변화랄지, 처지의 다름을 더 명확히 구분 짓는 말 같아서 오히려 조금은 더 쓸쓸해지고 마는, 투박한 말이라 느꼈다. 하지만 그게 H식의 따듯한 위로라는 것을 알기에 내내 못나기만 했던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내게 봄은 흩날리는 꽃잎 수보다 사람이 더 많은 벚꽃 놀이의 이미지와 잔바람 속에 떠도는 꽃가루 탓에 어수선하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빼곡한 낯선 봄의 햇살이 준비되지 않은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 어지럼증을 느끼다가 환절기 감기를 한번 앓고 나면 지나가 있는 계절. 하지만 작년 봄은 코로나 탓에 오히려 소란스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것을 잊고 오피스 건물 안에서 일만 하며 지내다 보니 어느새 여름이 코앞이었다. 그리고 완연한 여름이 오기 전, 나는 퇴사라는 선택을 내렸다. 오랜 고민 끝의 결정이었다.
퇴사 후 한 달째 팽팽 놀고 있던 어느 날 H에게 연락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