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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lum Feb 12. 2024

망한 소개팅의 사이드 이펙트 3

몸의 사유 # 에피소드 3

발이 아파서 걸을 수가 없었다. 한여름의 7시 무렵은 아직 해가 지지 않는 시간이었다. 저녁임에도 여전히 대낮 같은 열기가 콘크리트 바닥에서 위쪽으로 피어올랐다. 투명한 물에 남색 물감 한 방울을 툭 푼 것 같은 아스라한 어둠의 색은 낮을 가려줄 듯 말 듯 답답한 뉘앙스로 지표면 위에 살짝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저 멀리까지 바닥을 한번 쓱 훑어봤다. 요철이나 더러움의 흔적은 없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곧 너른 광장 한복판에서 신발을 벗어 들었다. 식사를 하며 한 잔 마신 맥주 탓에 두 뺨이 뜨거웠다. 약간의 취기가 신발을 벗어던지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평소 구두를 잘 신지 않아 그 신발을 개시한 것은 소개팅 당일이 처음이었다. 코가 뭉툭하고 둥근 베이지색의 메리제인 구두. 귀엽고 사랑스러운 디자인의 신발을 신고 소개팅 장소로 향하는 몇 걸음을 뗀 순간, 신발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발바닥과 닿는 바닥면은 미끄러운 데다 경사가 살짝 있어서 발이 앞쪽으로 쏠리며 땅을 박차는 걸음을 지탱해 주지 못하고 앞코 쪽으로 발가락이 곤두박질쳤다. 게다가 발등의 가죽 끈은 너무 타이트하고 짧아서 거의 살을 파고들 정도였다. 앞코로 쏠린 발가락과 가죽 끈이 짓누르는 발등은 얇은 여름 스타킹으로는 보호가 되지 않았다.


소개팅 장소가 위치한 지하철 역에 내렸을 때는 한 발작만 떼도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조금 두꺼운 양말이라도 사서 신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업무 지구 사이를 헤맨 끝에 겨우 찾아낸 애매한 느낌의 편집샵에서 가격을 납득하기 어렵지만 그나마 어울리는 것 같아 보이는 만 오천 원짜리 검정 양말을 샀다. 양말을 신으니 잠깐은 발이 한결 덜 아픈 것도 같았지만, 미끄러운 구두의 바닥은 양말을 신은 발을 여전히 지탱해 주지 못했다. 그러나 발의 아픔은 이제 어쩔 수 없었다. 10분 남짓 남은 약속 시간을 맞추기 위해 고통을 애써 무시한 채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음식점 앞에 미리 도착해 있던 상대방은, 그가 미리 알려준 착장으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고개를 숙여 스마트폰을 하고 있는 상대방의 목덜미를 바라본 순간, K가 말했던 외모에 대한 추측이 떠오르며 약간의 우려하는 마음이 든 것이 사실이다.


다음 순간 고개를 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상대방은 그가 왜 사진을 교환하지 말자고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게도 평범하고 훤칠한 모습이었다. 굳이 따져보자면, 지금까지 만났던 소개팅 상대방 중에 외적으로는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의 외모를 확인했으므로, K의 예측에서 전자는 사실이 아닌 것임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후자가 맞을까? 이 사람은 외모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인 것일까?


그러나 그와 눈이 마주친 바로 그 첫 조우의 순간, 어쩌면 나는 뭔가를 예감한 것 같다. 나를 바라본 상대방의 두 눈동자에 화르륵 생기가 돈 것이 아니라, 불이 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엇인가 그의 내부에서 스위치가 꺼졌다.


인간에게 초능력이 있다면 어떤 환상적인 마법 같은 게 아니라 이런 종류의 신호를 감지하는 능력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표정도 아닌 눈동자에서 그 느낌을 바로 읽어 내었던 것일까. 그러나 나는 짐짓 그 예감을 모른 채하며 소개팅에 임했다.


알고 보니 우리는 대학 동문일 뿐만 아니라, 단과대학도 같고 학번도 한 학번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서 함께 아는 친구가 여럿 있는, 한 다리 건너면 아는 그런 사이였다. 우리의 대화 소재는 자연스레 대학 때 이야기와 우리 둘의 상호 친구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다. 주문한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영화, 책 등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중간중간 적막이 흐를 때면, 상대방에게서 무리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화의 공백을 메우려 열심인 사람은 자주 나였는데, 이는 편하지 않은 자리에서의 나의 행동 패턴과 같았다.

다시 찾아온 침묵을 깨고, 나는 생각났다는 듯이 그에게 물었다.


"아, 그런데 사진을 교환하지 않는 게 조건이라고 들었어요.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돼요?"


다시 생각해 보면, 그를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내가 그에게 진심으로 궁금했던 유일한 것은 바로 이것뿐이었다.

그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어 아뇨? 저는 그쪽에서 사진을 교환하지 않고 싶다고 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어? 특이한 분이시네 했죠."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우리는 우리의 소개팅을 주선한 사람들 중 누가 범인일지를 두고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당사자도 아닌 제삼자가 사진 교환을 막을 이유가 있었을까? 아직까지도 상대방과 내가 사진을 교환하지 않게 된 이유를 나는 모른다.


이때까지도 나는 이 소개팅의 결말을 모르는 척했다. 소개팅의 경험이 적어 순진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소개팅이라면 으레 밥 먹고 커피 마시고, 그리고 마음이 마구 동하지는 않았어도 두 번 세 번은 만나 보아야 하는 것이라는 내가 배운 룰은, 이미 너무 오래 전의 구식 생각이었다.

상대방이 식당을 알아보았기에, 나는 미리 근처의 카페를 여러 군데 알아보았었다. 그가 밥을 사기에, 나는 엘리베이터를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가는 내내 커피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대낮처럼 환한 바깥으로 나왔을 때 그가 말했다.


"어느 쪽으로 가세요?"


나는 그제야 우리 둘 사이에 그 어떤 화학 작용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조용히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간다고 답했다. 갈림길이 나올 때까지 5분도 안 되었던 시간을 나란히 걷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검은 볼펜으로 꼬불꼬불 마구 그어댄 낙서 같은 기분이 머릿속에 어질러져 있었고, 우리는 말없이 걸어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와 헤어지자마자 발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날은 덥고 땀은 흐르고 발은 아프고 집으로 가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어 들었다. 벗은 발을 가려줄 만큼의 어둠은 아니었지만, 너른 광장 탓에 그 누구도 신발을 벗고 걷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소개팅을 주선한 H에게 전화를 걸었다. 딱히 할 말은 없었지만, 아무튼 결과를 보고한다는 핑계로, 사실은 누구와 무슨 말이라도 떠들어서 알 수 없는 찝찝하고 공허한 마음을 달래고 싶은 마음으로.


"잘 안 됐어."


H는 괜찮다고 말하며 이렇게 자꾸 소개팅도 해 버릇하면 언젠가 좋은 짝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한 번에 잘 될 수는 없는 거라며 위로했다. 나는 H에게 상대방은 사진 교환을 하지 말자는 말을 안 했다는 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봤다. H는 자기도 모르는 일이라고 했고, 나는 이상하다고 하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짧은 통화를 마치고 정신없이 광장을 걷다 보니 지하철 출입구가 나왔다. 나는 다시 고통의 메리제인 구두에 발을 구겨 넣었다.




메리제인 구두는 그날 이후로 수개월째 상자 속에 잠들어 있다. 십만 원이 넘는 구두의 가격이 아까워 당근이라도 할까 했지만, 왠지 타인에게 고통을 팔아넘기려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영원히 상자 속에 잠들어 있는 귀엽고도 귀여운 메리제인 구두. 버릴 수도 없는 애물단지 같은 구두. 그 구두는 오직 망한 소개팅을 상징하기 위해서만 신발장 깊숙이에 몰래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에는 그런 존재도 간혹 있는 것이구나.


한 번 만나서 두어 시간을 보낸 게 전부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 리 만무하고, 사실 나 역시 어떠한 설렘도 작은 이끌림도 없던 게 사실임에도 마음이 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밤이 되자 생각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처음 마주쳤을 때 그의 눈빛에서 실망감 같은 것이 엿보였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사진 교환을 안 하고 싶다는 것은 오해였고, 우리가 만났을 때 그가 내 실물을 확인하고 실망했다고 밖에 해석할 수가 없었다. 결국 또 외모가 문제가 된 것인가? 내가 조금 더 예쁘고 날씬했더라면 소개팅의 결말이 달라졌었을까? 나는 마치 내 의견은 전혀 없는 수동적인 존재가 된 것처럼 그렇게 생각했다.


연애를 하고 싶으면 우선 살 빼고 외모를 가꾸라는 K의 예전 조언이 떠올랐고 망한 소개팅이 불러낸 나약한 정신은 K의 말이 정말 진리인 것인가,라는 생각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나는 6개월 전, 아직 재직 중일 당시에 발품을 팔며 알아보다가 적당한 곳을 찾지 못했고, 바쁘다는 핑계로 시작하지 않았던 PT를 이제는 시작할 때라고 생각했다.



소개팅 다음날 초대받았던 집들이. 와인을 잘 몰라 패키지가 예쁜 것을 선물로 샀고, 친구가 무척 좋아해 줬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모두가 같은 와인병을 고르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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