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반으로 달려가던 어느 날 나는 불현듯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살던 수유리 옛집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 내 기억 속 옛집 근처에는 시내버스가 다니는 큰길이 있어 그 길만 찾으면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집 근처 큰길 외곽으로 더 큰 길이 생기고 큰 도로 주변으로 새로운 주택가와 아파트까지 들어서면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시절 수유리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내 주민등록에 기록된 과거 주소가 있어도 찾기 힘들었다. 정부가 기록하고 보관한 서류에 적힌 옛 주소는 지금 없는 지번이었다. 그나마 비슷한 숫자의 번지는 수유동과 쌍문동을 가르며 흐르는 우이천 한구석의 하천부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난 기준이 될 만한 장소를 추린 다음 항공사진과 지도에서 옛 동네를 특정해 발품을 판 후에야 내가 살던 골목과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버젓이 존재하는 곳의 옛 주소가 왜 없는 지번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근처 주민복지센터에서는 알아낼 수 없어 강북구청 여러 부서를 방문했다. 그렇게 공무원 여럿을 귀찮게 만든 후에야 먼지 쌓인 오래된 서류철을 찾을 수 있었고 나의 옛집 주소가 왜 없는 지번이 되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내가 살던 당시 수유동은 성북구였고 그 후에 도봉구로, 또 강북구로 분구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 가족이 살던 집 주소도 수유동에서 쌍문동으로, 쌍문동에서 다시 수유동으로 담당 구청이 바뀔 때마다 계속 바뀌었다. 게다가 수십 년 전에 수기로 변경 사항을 기록한 서류만 남아있으니 전산으로 확인할 수도 없었을 것.
나는 옛집을 찾은 기쁨만큼 보람도 컸다. 작은 단서들을 모아 과거의 모습을 유추하고 현재 남은 흔적을 찾아냈을 때 솟아오르는 희열은 오십 평생 처음 느껴본 성취감이었다.
본능처럼 난 수유동의 과거 흔적을 찾아내 현재의 모습과 비교하며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수유동을 탐구하며 알게 된 여러 역사적 사실, 지금은 사람들에게 잊힌 이야기까지 발굴할 수 있었고, 한 매체에 연재까지 할 수 있었다. 어느덧 나는 외출할 때마다 탐사의 눈으로 도시 곳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살던 옛집을 찾아가는 여정을 50대 중반에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시절 난 수유리 옛집이 그리워 찾아가곤 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1974년 초에 태어났을 때부터 살던 수유리를 떠나 서교동으로 이사했다. 예전에 살던 집도 골목에 있었고 새로 이사한 집도 골목에 있었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어찌 된 일인지 내 또래 친구가 없었다. 학교에는 같은 반 친구가 있었으나 등하굣길을 같이 다니고 골목에서 함께 놀 친구가 없었다.
또래 형제도 없는데 또래 친구까지 없으니 학교에서 돌아오면 심심했다. 그래서일까 예전 살던 동네의 골목과 골목을 함께 쏘다니던 친구들이 그리웠다.
몇 달 후 2학년 여름방학이 되자 나 혼자 길을 나섰다. 이사하기 전 어머니와 수유리에서 서교동을 몇 번 다녀본 기억을 되살렸다. 그 반대로만 따라가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날의 두려움, 혹은 설렘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시내 어디에선가에서 버스를 갈아탈 때 어른들에게 이 버스가 수유리에 가는지 물어볼 엄두는 내지도 못하고 차 벽에 붙어 있던 ‘수유리’라고 쓰인 노선과 어머니와 함께 탔었던 버스 번호가 맞는지만 확인하고 탔다. 나 혼자 떠난 첫 여행이었다.
긴장감 속에 서울 도심을 지났다. 삼선교를 지나고 미아리를 지나니 멀리 바위산들이 나타났다. 북한산이었다. 버스 유리창 너머로 바위가 줄줄이 늘어선 봉우리들이 보이자 안도했던 게 기억난다. 눈에 익은 저 큰 바위 아래에 내가 살던 옛 동네가 있었으니까.
수유리에 무사히 도착했다. 구멍가게 주인아저씨 내외가 반가이 맞아주던 모습과 내가 살던 골목 친구들이 놀라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내가 살던 집에 찾아갔는지는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다만, 그리워서 찾아간 수유리 옛 동네에 오래 머물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집을 멀리 떠나 왔다는 불안감에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왔던 것 같다.
그렇게 불안감으로 시작한 내 첫 여행은 안도감으로 마쳤다. 대중교통의 미덕은 정해진 목적지에 웬만하면 데려다주는 것에 있다. 채 열 살이 되지 않은 내가 대중교통이라는 어른들의 시스템을 신뢰하게 된 계기가 된 하루였다.
그날 이후 몇 번 더 수유리에 갔었다. 그러나 서교동 골목에 내 또래들이 이사를 오자 난 그들과 친구가 됐고 동네에 친구가 늘어나는 만큼 수유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3학년 여름방학은 좀 더 멀리 가보았다. 1975년은 서울에 지하철이 생기고 전철은 수원과 인천으로 연결된지 1년이 되는 해였다. 2학년 때는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3학년이 되자 나는 지하철과 전철을 타고 서울과 서울 근교를 돌아다녔다.
어느 날은 서울역에서 전철을 타고 인천역까지, 다른 날은 수원역까지 다녀왔다. 인천과 수원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무사히 다녀온 것만 기억난다. 열차 안 어른들이 어린아이 혼자 어딜 가느냐 물어볼까 봐 무서웠던 기억도 있다. 어린이를 유괴해 껌팔이를 시킨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던 시절이었다.
그 이후에도 방학이면 혼자 버스나 전철을 타고 쏘다녔다. 중학생 시절까지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2학년 때와 3학년 때 떠난 그 여행만 뚜렷이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나 혼자 다닌 짧은 여행이 어쩌면 탐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이나 잡지에 나오는 탐험처럼 미지의 세계가 아니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현실 세계였지만 열 살 남짓 어린아이에게는 처음으로 개척하는 나만의 세계였으니까.
당시 많은 어린이가 그랬듯이 나도 위인전이나 어린이 잡지에 소개된 탐험 이야기에 열광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른 도움 없이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다녀오는 짧은 여행을 즐기며 나만의 탐험이라 여겼을 것이다.
오십이 넘어 자연 탐사 다큐멘터리에 빠지며 알게 된 현대적 의미의 탐험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 가는 것뿐 아니라 이미 알려진 곳에 가더라도 새로운 관점으로 그곳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런 관점이라면 내가 시도하는 고향 탐구와 도시 탐사도 탐험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도 이미 탐험가였다. 도시탐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