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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머치드러거 Apr 04. 2018

최고의 힐링 드라마, 블랙 미러.



안녕하세요. 브런치를 쭉 둘러보니 글을 잘 쓰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네요. 그런데 분위기가 너무 딱딱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역행하고 싶다는 소년의 파괴본능이 오랜만에 저를 자극하더군요. 네, 본능에 손가락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브런치를 약으로 물들이겠다는 사명감이 솟아오르네요. 


여러분, 블랙 미러라는 영국 드라마를 아시나요? 알고 있다면 당신은 세상을 시니컬하게 바라보는 이 시대의 지성인입니다. 모른다면 그냥 피시 앤 칩스나 드십시오. 여왕님도 추천하는 자타공인 영국 최고의 음식입니다. 영국산 드라마라서 그런지 제목부터 영국 날씨처럼 어두침침하네요. 까만 거울이라니... 거울에 매직이라도 칠한 걸까요? 하긴 저도 가끔 거울을 볼 때 흠칫하고 놀라곤 합니다. 드라마 내용은 그들의 음식처럼 더 끔찍할 것만 같네요.


동정심이 풍부하고 마음이 약하신 분들은 이 드라마를 피하시는 게 좋습니다. 보다 보면 등장인물들을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붙이거든요. 지금 이 시간에도 밥을 굶고 있을 다이어터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와 대신 치킨을 시켜먹는 저로서는 '작가가 S 성향인가?'하고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블랙 미러]의 탁월한 연출은 우리를 그 상황에 과도하게 몰입을 시킵니다. 마치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요. 뭐든지 적당한 게 좋습니다. 횡령도 적당히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누구처럼 구속되고 그러는 거죠. 미리 주의를 드리겠습니다. [블랙 미러]의 인물들에게 정을 주지 마십시오. 그리고 호흡은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마세요.


[블랙 미러]의 장르는 SF 옴니버스입니다. 한 시즌에서 하나의 스토리가 쭉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 독립된 단편을 모아놓은 것이죠. 이러한 것을 ‘앤솔로지’(Anthology)라고도 합니다. 석유 되기 직전인 아재들은 아마 ‘환상 특급’을, 아직 화석 상태인 유사-아재들은 ‘기묘한 이야기’를  떠올릴 수도 있겠네요.


 

[블랙 미러]의 세계는 에피소드마다 다릅니다. 요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몬스터버스 등 세계관이 참 많죠? 이런 것들이 다른 작품끼리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것이라면 [블랙 미러]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평행우주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네? DC요? DC에서 영화가 나온 적이 있었나요? 착각을 단단히 하시고 있군요.(단호)

 

에피소드 속 사회는 대개 기술이 지금보다 더 발전해있습니다. '훨씬'이 아닌 ‘더’라는 것에 집중하세요. 바꿔 말하면 지금도 충분히 있을 만한 기술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거죠. 예를 들어볼까요? 지금의 VR은 사람에게 요상스러운 헤드셋을 씌워야 합니다. 사람을 방금 중성화 수술을 하고 나온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다가 휴대성이 없다시피 하고 여러모로 거추장스러워요.


[블랙 미러]에서는 뇌에 메모리칩 하나를 박아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버리죠. 조그마한 리모컨 하나로 직접 눈으로 보는 듯한 생생한 영상을 즐길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지하철에서 뭘 보길래 저렇게 멍을 때리고 침을 질질 흘리는지 아무도 모를 거란 소리죠! 물론 먹방 영상인 거 다 아시죠? 아무튼 이러한 점이 극 중에 현실감을 불어넣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정말 미래에 저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만들죠. 몰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아주 좋아합니다. 특히 자신이 한낱 우주의 먼지같이 느껴질 때 틀어놓곤 하는데요. 우울함이 상쇄되면서 ‘내일은 더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원동력을  얻게 되거든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으셨나요? 저의 현 상황과 [블랙 미러]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비교해볼까요? 좀 더 쉽게 이해가 되도록 예를 들어봅시다. 다음 예문에서 각각 저와 등장인물을 상징하는 걸 찾아보세요!


A는 주말에 늦잠 자고 일어나 배 벅벅 긁으면서 엄마를 찾습니다. 밥 달라는 거죠. A는 말로만 듣던 방구석 여포였습니다. 엄마는 아침 인사로 A 등짝을 짝 때리고 밥상을 차려 놓습니다. 그러면 A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거죠. 점심 먹은 후에는 귤 까먹으면서 이불 뒤집어쓰고 유튜브를 봅니다. 귤껍질을 안 버렸다고 엄마가 무서운 표정을 짓지만 저는, 아니 A는 못 본 척합니다.  일 안 하는 소화기관 때문에 속이 더부룩하지만 일어나기는 싫어서 그냥 누워있습니다. 저 세상 리액션을 하는 스트리머들을 보며 낄낄대다가 또 잡니다. 새벽에 깨서 또 하루를 허망하게 보냈다며 잠깐 우울해하다가 또 잡니다. 


자! 예문 끝입니다. 참고로  점심 메뉴는 어제 끓이고 남은 된장찌개예요. 당연히 A는 접니다. 혹시 그냥 본인에게 어제 있었던 일 써놓은 거 아니냐고요? 그 입 닫으십시오. 여러분 때문에 인류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다들 맞추셨겠지만 [블랙 미러]의  등장인물을 상징하는 건 바로 귤껍질입니다. [블랙 미러]의 세계에서 등장인물들이 받는 취급은 보통 저 정도거든요. A가 까먹은 귤은 나름 제주도 출신입니다. 귤 중에서도 하이 클래스에 속하죠. 같은 나무에서 자라난 친구들과 햇빛 경쟁을 해가며 열심히 몸을 불려 나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무에서 강제로 떼어지더니 등급별로 분류가 되기 시작합니다. 씨앗 시절부터 함께 지내왔던 친구들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죠. 박스에 넣어지고, 또 어디론가 실려 갔습니다. 그 귤이 마지막으로 햇빛을 본 건 A가 그를 집어 들 때였죠. 


Rest in Peace, Gyul…

 

[블랙 미러] 속의 인물들이 얼마나 시궁창같이 살고 있는지 이해 가시나요? 물론 등장인물을 개차반같이 취급하는 드라마는 많아요. 예나가 선정이 딸이라는 걸 안 뒤로부터 저는 오렌지 주스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김치 싸대기는 정말... 언제 김치가 제 싸대기로 날아올지 벌벌 떨다가 결국 김치 없이 라면을 먹곤 했었죠.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런 드라마 속 인물들이 한 나라의 총리로서 공주를 살리기 위해 테러리스트가 요구하는 대로 돼지와 섹스를 하던가요? 혹은 지배적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소중한 것을 빼앗겨, 대중들 앞에서 절규했던 자신의 행동이 결국 또 하나의 프로파간다로, 체제의 선동 수단으로 변질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나요? 시궁창 같은 사람들이 더 시궁창 같은 세계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 [블랙 미러]죠. 21세기 힐링 드라마 중에서 단연코 제일 뛰어난 작품이라 확신합니다. 이 드라마를 보실 여러분께 X를 눌러 JOY를 표하겠습니다.


2011년에 방영된 [블랙 미러] 시즌 1은 '센세이셔널'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1화인 ‘국가(The  National Anthem)’가 제일 유명하죠. 유튜브 좀 본다 하시는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저도 썸네일에 낚인 사람 중 한명이죠. 소재가 굉장히 자극적이거든요. 저는 이 드라마의 존재를 1년 전에 알게 되었어요. 그때는 이미 시즌 3까지 나와 있었죠. 방학이었으니 망설일 것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몰아서 봤죠. 이미 그곳에 순수하고 꿈 많던 청년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피폐한 정신을 가진 염세주의자만 남아있었을 뿐.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난 그 사실을  몰랐어


사실 시즌 1을 다 보고 ‘그만할까…’ 생각도  했지만, 이미 시즌 2를 틀고 있더군요. 시즌 1보다는 임팩트가 약했지만, 충분히 이름값을 했습니다. 그 후에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에피소드를 내놓았는데요. 말이 드라마지 분량이나 퀄리티가 영화나 다름없습니다. [블랙  미러]와 크리스마스라니. 이게 무슨 끔찍한 혼종일까요? 노벨 평화상을 받은 히틀러가 처칠에게 감사의 키스를 날리는 걸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제작진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로맨틱한 제목에 속아 넘어간 커플들의 분열을 기원한 것이 분명해요.


이 에피소드는 끝까지 보기가 정말 힘듭니다. 정신이 실시간으로 피폐해지는 걸 느낄 수 있거든요.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두 남자가 있는 외딴 오두막에서 시작합니다. 무려 5년간이나 같이 지냈다고 하네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동성 친구와 5년 정도 같이 살면, 함께 목욕도 하고 가끔은 분위기 잡고 멋진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뭔가 서먹서먹하네요. 이별과 재결합을 반복하기라도 한 걸까요?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서로에게 '썰'을 푸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국어 시간에 안 조신 분들은 액자식 구조라는 말을 들어봤을 겁니다. 썰 안의 또 다른 썰이죠. 개인적으로 썰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묘하게 흥분이 되는데요. 썰이란 대개 자극적이기 때문이죠. 화자의 적절한 말솜씨와 MSG가 잘 버무려지면 밥 한 그릇 뚝딱! 그것도 화자 옆에서 들으면 머릿속으로 저절로 영화 한 편이 틀어지는 듯한 현장감이 들죠.


이 에피소드가 딱 그런 느낌입니다. 아주 주관적으로 [블랙 미러] 에피소드 중 TOP 3안에 당당히 집어넣을 수 있어요. 자세한 내용은 직접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봐야 [블랙 미러]의 진정한 정수를 느낄 수 있거든요. 모르고 뒤통수 맞는 것과 알고 맞는 건 분명 차이가 있죠. 여러분도 학창 시절에 빵 사러 가기 전에 많이 겪어보았을 테니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시즌 3부터는 넷플릭스에서 제작되었습니다. 괜히 천조국 기업이 아니죠?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니 에피소드의 개수가 3개에서 6개로 늘어났습니다. 팬들 입장에서는 치킨을 시켰는데 닭다리가 6개가 온 기분이었죠. 하지만 치킨집 사장님은 부담스러웠습니다. 본사가 어느 거대한 기업에게 인수되었는데 그 직원들이 갑자기 돈다발을 갖고 쳐들어와서는 '제발 이 돈을 써서 손님들에게 닭다리를 6개씩 줘라'라고 하니 말이죠. 사장님은 얼떨떨하면서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칙칙했던 매장 때깔부터 바꾸고 더 좋은 재료를 쓰지요. 그런데 본사에서 지원해주는 돈이 너무 많습니다. 이러다가 매장이 망하기라도 하면 본사의 눈총을 받을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죠.

  

니 돈 아니라 이거죠?

 

아무리 날고 기는 제작진도 갑자기 대규모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 어깨가 무거워지는 법입니다. 내 돈도 아니고 남의 돈인지라 제작진은 시즌 3을 꼭 성공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겠죠. 그래서인지 시즌 3은 포용하고자 하는 시청자의 범위를 억지로 늘린 듯한 느낌이 있어요.

그도 그럴 것이 [블랙 미러]는 원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드라마입니다. 시청자들을 정신적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목표인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뒤통수 때리는 전개를 펼쳐나갔죠. 저는 물론 이런 걸 즐기지만, 나 재밌자고 보는 드라마에서까지 심리적으로 압박되는 것을 불쾌해하는 시청자들도 분명 존재하거든요. 요즘 세상 사는 게 얼마나 팍팍합니까. 


시즌 3은 돼지와 사람의 섹스처럼 난생처음 들어보는 극단적인 상황보다는 비교적 대중에게 익숙한 소재를 풀어나갑니다. SNS, 가상현실, 몸캠 유출, 인종 학살 등... 이렇게 써놓고 보니 그다지 평범한 소재는 아닌 것 같네요.  [블랙 미러]는 괜히 [블랙 미러]겠어요? 기술의 무분별한 발전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여전히 유지하면서도 적당히 흥미롭고 적당히 찝찝하며 적당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죠. 저는 이전 시즌에 비해 굉장히 편한 마음으로 스무-쓰하게 봤습니다. 전에는 보면서도 정말 저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고 끔찍하고 온갖 감정을 다 느꼈거든요. 


다만 아쉬운 점은 시즌 3에 무언가 강력한 한방이 없었다는 거죠. [블랙 미러]만의 대놓고 의도적인 우울함, 그 변태 같은 찝찝함이 주는 무기력함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빨리 시즌 4가 나와서 이 갈등을 채워줬으면 했죠. 제작이 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자료가 죄다 영어여서 언제쯤 완성이 될지 알 방도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영어 울렁증이 심한 편이죠. 영어로 된 긴 글만 보면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거품을 물곤 해요. 그래도 제가 리스닝은 좀 됩니다.


그런데 2017년 12월! 시즌 4가 기습적으로 넷플릭스에 공개되었습니다. 딱 좋은 타이밍이었죠. 한 학기를 시원하게 말아먹고 난 직후라 제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어요. 레드벨벳이 컴백했다고요? 차라리 레드 벨벳 케이크를 먹겠습니다. 트와이스가 역대급 미모를 과시했다고요? 차라리 과식을 하겠습니다. 김세정이 화보를 찍었다고요? 어머, 그건 사야 해! 제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아시겠습니까? 넷플릭스 재구독 버튼을 누르는 손길은 거침이 없었죠. 저한테는 [블랙 미러]의 어둠의 다크니스가 절실했어요. 물론 그날 밤에 베개에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습니다. 내 치킨... 내 만 이천 원... 이번에는 이틀에 걸쳐서 봤습니다. 흠터레스팅... 제작진에게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혹시 핑크빛 연애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전국의 솔로 여러분, 대영제국을 향해 죽창을 드십시오. 영국의 자칭 신사라는 작자들에게 대한민국의 김치 맛을 보여줄 때입니다. [블랙 미러]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자극적이지가 않아요. 늘어난 제작비에 비례해서 영상미는 더 수려해졌으나 뭔가 싱겁습니다. 역시 한국인은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걸까요? 하지만 재미는 있습니다. [블랙 미러]는 이번에도 역시 등장인물을 똥통으로 처넣습니다. 원래 남의 일이 꼬여가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법이죠. 그래서 우리가 꽈배기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런 [블랙 미러]도 만족합니다. 아무리 싱거워졌다 하더라도 다른 드라마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불쾌함은 여전했거든요. 다만, 넷플릭스는 [블랙 미러]를 좀 더 많은 사람이 시청하길 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서 숨 죽인 채 '감상'해야 할 것 같았던 이전 시즌들과는 달리 시즌 4는 훨씬 가벼워졌죠. 그러나 역시 여자 친구와 함께 보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염세주의에 빠져 서로가 자갈치 시장 4번 가판대 건어물처럼 보일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그런 상상 속의 동물은 제쳐두고 제발 부탁하건대 혼자 보십시오.

 


시즌 4에서 개인적으로 주목할 만한 에피소드는 1화, 4화, 그리고 6화 정도가 있겠네요. 1화는 너무 식상한 소재를 다뤘다고 비판을 많이 받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살펴볼까요? 가상현실 게임을 개발한 데일리는 회사 설립자임에도 불구하고 내성적인 성격때문에 알게 모르게 소외당하고 있습니다. 일개 프론트 직원조차 데일리를 무시합니다. 벌써 진부하죠?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이건 우리 모두의 얘기입니다. 데일리는 현실에서 쌓인 울분을 풀기 위해 자기가 좋아하는 고전 SF 드라마(스타트렉)를 컨셉으로 자신만의 가상현실 게임을 만드는데요.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오타쿠입니다. 낯설지 않죠? 


문제는 게임 속에 자신을 무시하는 직원들의 DNA를 무단 채취해서 게임 아바타를 만든다는 겁니다. DNA 정보를 기반으로 복제된 인격이 주입되는 거죠.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들어볼까요? 데일리가 여러분의 DNA를 채취합니다. 머리카락이든, 컵에 묻은 입술 자국에서든, 한번 빨아먹고 놔둔 막대사탕에서든 말이죠. 데일리는 그 DNA를 게임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게임 속에서 눈을 뜹니다. 분명히 본인을 '나'로서 자각하고, 육체도 실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닌 거죠. 여러분은 단지 하나의 복제된 데이터일 뿐입니다.


데일리는 그 게임 안에서 마치 신처럼 군림하며 직원들을 굴복시키죠. 현실에서 당하고 사는 분노를 그곳에서 푸는 겁니다. 상당히 어긋난 오타쿠라고 할 수 있죠. 우리는 저렇게 되지 않도록 적당한 덕질을 지향해야 합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오타쿠뿐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은 데일리와 같은 욕망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사회나 인간에 대한 분노, 혹은 핍박받는 설움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그 분노를 해소하곤 하죠. 저는 보는 내내 데일리가 눈에 걸렸어요. 그는 억눌린 욕망과 분노를 현실에 분출하지는 않죠. 해소 방법으로 나름 합리적인 가상현실을 택했을 뿐인데 너무 비참한 몰락을 안겨줘서 안타까웠습니다. 우리도 머리 속으로 김과장 그 새X한테 별짓을 다 하잖아요? 물론 데일리가 DNA를 무단으로 채취한 것은 해서는 안될 짓이었지만요.


4화는 남녀가 나와 꽁냥꽁냥 하는 내용입니다. 기분이 좋지 않네요.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블랙  미러]는 시궁창 같아야 하는데 이 남녀는 행복해 보입니다. 이율배반적인 존재들이죠. 그래도 [블랙 미러]로서는 참신한 시도였습니다. [블랙 미러]의 아이덴티티와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저는 좋았어요. 충분히 예상이 되는 전개와 반전이었음에도 꽤나 흥미진진하게 봤습니다. 베드신이 많이 나와 제게는 더욱 가치 있는 에피소드였어요.

 

자, 대망의 6화입니다. 제작진이 원기옥이라도 모은 걸까요? 6화는 시즌 4의 하이라이트이자 클라이맥스이자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제작진은  의도적으로 이 에피소드를 제일 마지막에 배치했을 겁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네요. "야, 우리 아직 안 죽었다. 우리 이런 거 더 만들 수 있어." '화이트 크리스마스'이후 제일 [블랙 미러] 다운 에피소드였습니다. 이 에피소드도 ‘화이트 크리스마스’처럼 두 등장인물이 서로의 사연을 나누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앞에서도 말했죠? ‘???: 야, ~한 썰 푼다!’ 식의 전개 방식은 우리도 그 썰 안에 있는  듯한 현장감을 줍니다. 6화에서도 어김없이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죠. 워낙 매력적인 이야기니까요. 6화에서는 정말 시궁창 중에 시궁창 같은 사람들이 다섯 명이나 나옵니다. 역시 자세한 설명은 못 드리겠네요. 


???: 시궁창이 5명


하나 언급하고 가자면, 유독 이번 시즌에는 ‘의식의 복제’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1화는 복제된 의식이 데이터화 되어 가상현실 게임으로 들어가죠? 또 하나, 6화에서는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죄수의 의식을 추출해 데이터화 시킵니다. 그의 육체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 죄수의 정신은 분명 실재하고 있어요. 한 박물관에서 죄수의 정신을 홀로그램으로 띄워 전시를 합니다. 정신은 육체와 달리 늙지도 않고 허기를 느끼지도 않죠. 잠은 올까요?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확실한 건 이 죄수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벌을 내린 셈입니다. 하지만 박물관장은 한 술 더 뜹니다. 죄수를 가상의 전기의자에 앉혀 전기충격을 가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액티비티'를 고안해내죠. 박물관에 관람객이 많을 때면, 죄수는 죽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전기의자에 앉아야 하는 겁니다. 그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면서요. 관람객들은 그걸 지켜보며 아주 즐거워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박물관장은 천부적인 장사꾼이거든요. 액티비티가 끝나면 일종의 '기념품'을 관람객에게 줍니다. 죄수가 전기충격을 받고 있는 순간의 정신을 복제해서 열쇠고리 안에 넣은 것이 기념품이라네요. 죄수의 복제된 정신은 열쇠고리 안에서 끊임없이 전기충격의 고통을 느낍니다. 영원히요. 너무 잔인하다고요? 인간은 그 정도로 미개하지 않다고요? 드라마일 뿐이라고요? 좀 오래된 일이지만, 팔레스타인 폭격을 구경하면서 폭탄이 터지는 모습을 보고 박수를 치던 '사람들'을 기억하실지는 모르겠네요.


복제된 의식과 ‘나’는 육체의 유무를 제외한다면 뭐가 다를까요? 어버버 거리고 있다면 여러분은 정상입니다. 저도 잘 모르거든요. 그 차이점을 알아내는 건 철학자나 과학자의 몫이죠. 사실 저는 그 고통을 겪는 게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제된 의식도 ‘나’잖아요? 원본과 복제본이라는 명칭의 차이만 있을 뿐 완전히 동일한 '나'입니다. 어디선가의 ‘나’가  뇌가 전기구이로 바싹 익혀지는 고통을 끊임없이 겪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끔찍하죠? 그 ‘나’는 영겁의 고통을 겪고 있는 본인을 ‘나’라고 인식하고 있을 텐데  말이죠. 점점 머리가 아파오네요. 오늘은 문과라는 핑계도 못 대겠네요. 저는 그냥 의식을 복제 안 하겠습니다. 죽을 때가 되면 죽어야지요. 물론 그때 가서 볼 일이지만요. 한 가지, 분명한 건 6화만으로도 시즌 4를 볼 가치가 있다는 거죠.


흥미롭지 않나요? 저는 이런 의문 거리를 수도 없이 던져주기 때문에 [블랙 미러]를 좋아합니다. 비록 예전만큼의 임팩트를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지만요. 그래도 시즌 4의 6화처럼 발군의 우울함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하나라도 더 볼 수 있다면, 저는 시즌 5를 기다릴 겁니다. 그리고 또 넷플릭스를 결제하겠죠. 여러분도 [블랙 미러]를 꼭 보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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