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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Feb 09. 2019

사려 깊은 온정의 응시 <로마>



바닥에 고인 물에 반사된 하늘의 이미지. 영화 <로마>의 첫 장면이다. 이 오프닝씬은 굉장히 역설적이다. 시멘트 바닥을 청소하기 위해 뿌린 물은 바다의 파도처럼 보이고 바닥에 고인 물은 하늘을 반사해 보여주고 있다. 땅이면서 바다처럼 보이고 바닥이면서 하늘을 보여준다. 사실은 그냥 땅바닥일 뿐, 바다도 하늘도 아닌데. <로마>는 땅바닥의 여자, 클레오가 바다와 하늘에 닿는 여정을 사려 깊게 바라보는 영화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전작 <칠드런 오브 맨>, <그래비티>에서 경이로운 롱테이크를 보여주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번 신작 <로마>에서도 역시 감독의 장기인 롱테이크가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다. 하지만 이번 롱테이크는 전작들에서 보여준 그것들과는 다르다. 전작들의 롱테이크는 동선이 복합적이고 현란한 화면을 보여주기 위한 기술적 완성도가 높은 롱테이크였다면 <로마>의 롱테이크는 인물의 동선이 간결하며 카메라 역시 단순하고 느릿한 좌우 패닝을 사용하는, 전작들 보다 한껏 힘을 뺀 롱테이크다. 또한 이 영화는 클로즈업이 거의 없고 대부분 롱 쇼트로 찍힌 화면들을 보여준다. 롱 쇼트로 잡힌 화면을 느릿하게 좌우로 패닝하면서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것. 내셔널지오그래픽의 관찰 다큐멘터리에 딱일 것 같은 이 촬영 방식은 전형적인 관찰형 시선이다. 하지만 <로마>는 클레오를 관찰하지 않는다. 분명 카메라는 클레오와 거리를 두고 동선을 집요하게 쫓아가며 눈을 떼지 않지만 이는 관찰이 아니라 사려 깊은 온정의 응시다.


영화 초반 클레오는 남자친구 페르민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러나 주변엔 같이 일하는 동료도 있고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클레오는 아이들을 잠시 다른 곳으로 보내고 동료에게도 자리를 비워달라고 부탁한다. 이 번거로운 과정이 다 끝날 때까지 프레임 안에 클레오를 잡고 있던 롱 테이크는 본격적 페르민과의 대화가 시작되려는 순간 씬을 전환한다. 바로 다음 씬에서 동료가 클레오에게 무슨 대화를 했냐고 묻는 장면에서도 "나중에 이야기해줄게"라는 대답만 있을 뿐, 클레오의 대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후에 클레오와 페르민의 모텔씬에서도 카메라는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이게 페르민의 나체를 보여주면서도 클레오와 페르민의 정사가 시작되려는 순간 다시 화면을 전환한다. 이처럼 카메라가 클레오를 계속해 잡고 있으면서도 사적인 장면은 의도적으로 배제 시킨다는 점에서 <로마>의 롱테이크는 관찰이 아닌 바라보기의 롱테이크, 기술적 롱테이크가 아닌 정서적 롱테이크라 할 수 있겠다.


촬영 기법 말고도 이 영화에선 한 가지 더 특이한 연출이 있다. 바로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멈추지 않고 들리는 소음이다. <로마>속 소음은 세기의 강약만 있을 뿐 정말 말 그대로 한순간도 완벽한 정적을 허락하지 않는다. 감독의 전작 <그래비티>에선 화려한 폭발씬에서도 과감하게 소리를 배제한 사운드 믹싱을 보여주며 인물의 고독함과 고립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는데 그와는 정반대의 연출인 것이다. <로마>의 소음은 프레임 안에서 발생하는 경우 보다 프레임 밖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러닝 타임 내내 프레임 안에 들어와 있는 클레오는 이 멈출 줄 모르는 외부의 소음 안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클레오는 소음 속에만 파묻혀 있는 것이 아니다.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도 파묻혀 있다. 클레오의 고용인 소피아가 출장 가는 남편을 배웅하고 홀로 남겨지는 장면에서 소피아는 행진하는 군악대의 행렬에 파묻히고 클레오 역시 가려진다. 무(武)에 심취한 페르민은 정치 깡패가 되어 클레오를 떠난다. 또 만삭의 몸으로 성체축일 대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한복판에서 겪기도 한다. 하지만 온몸으로 이런 역사적 사건의 풍파를 맞는 클레오와 인물들은 이 사건들 자체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특히 성체축일 대학살은 멕시코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스쳐 지나가는 파도처럼 그려진다. <로마> 속 인물들이 이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날리는 대사는 딱 한마디다. "오늘은 대학생들이 맞으면 안 될 텐데". 거창한 대의명분도, 시답잖은 정의론도, 표리부동의 정치놀이도 없는 깔끔한 표현이자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를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코멘트가 아닐 수 없다.


이 영화에선 물의 이미지가 러닝 타임 내내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나온다. 영화의 제목이 <셰이프 오브 워터>였어도 잘 어울렸을 것 같다. 우선 앞서 언급한 역설적인 오프닝 바닥 청소씬. 출장을 핑계로 바람을 피우러 간 남편에게 소피아가 아이들을 불러 억지로 편지를 쓰게 만드는 시퀀스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우박. 클레오의 임신 소식을 듣고 도망간 페르민을 찾으러 갈 때 바닥에 깔려 있는 흙탕물. 성체축일 대학살의 현장 한복판에서 터져 버린 양수. 수영을 못 하지만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러 달려가는 클레오를 덮치는 파도. 이처럼 상황과 인물의 심리에 조응하여 변주된 물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로마>는 흑백영화의 표현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한다.



2시간의 러닝 타임 동안 끊임없는 소음과 역사적 풍파에 파묻혀 나아가던 클레오의 모습을 한 장면으로 집약하는 시퀀스는 단연 마지막 파도 시퀀스다. 아마 쿠아론 감독은 이 시퀀스를 찍기 위해 <로마>를 만들었을 것이다. 수영을 못 한다는 클레오가 맨몸을 던져 바다에 들어가고 맹렬한 파도에 맞서 결국 아이들을 구해오는 과정은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클레오가 아이들을 구해와 환한 햇살이 비치는 모래사장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유산된 아이에 대한 진심을 고백하는 장면은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자 이 영화가 지향하는 연출 형식의 종착역이다.


<로마>는 파도 시퀀스에서 자신이 지향하고자 한 형식의 결말을 보았다. 주제는 식상한 사랑 타령일지 몰라도 이 영화는 지겨운 영화가 아니다. 예술을 완성하는 것은 주제가 아니라 형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를 읽고 감동하는 이유는 보편적인 사랑을 논했기 때문이 아니라 경이로운 표현을 마주했기 때문이 아닌가. 종착역을 지나온 쿠아론 감독은 이제 클레오를 놓아준다. 좌우를 전망하던 패닝은 마지막 씬에서 클레오와 함께 수직으로 틸팅 하게 되고 고인 물에 비친 하늘만 보던 카메라는 마침내 진짜 하늘을 마주하게 된다. 카메라는 이제 더 이상 클레오를 쫓지 않는다. 클레오가 비행기처럼 하늘에 닿도록 승천한 건 아니지만 2층 건물의 옥상만큼 하늘에 더 가까워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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