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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Sep 20. 2019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

쿠엔틴 타란티노가 필요한 이유


충격적인 실화 사건을 다루고 있는 영화고 세계 최고의 배우들이 대거 등장해 폭발적인 연기를 선보이지만 이 영화의 지배자는 결국 쿠엔틴 타란티노다. 평생 서부 영화를 탐닉했던 그가 가상의 배우를 만들어 서부 영화 스타로 등장시킨다. 하지만 서부 영화의 시대는 끝났고 서부 영화의 스타 역시 몰락을 맞는다. 10편의 영화를 만들고 은퇴하겠다는 타란티노가 9번째로 이 영화를 만들고 “<원스 어 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가 반응이 좋으면 바로 은퇴할 수도 있다”고 한 발언이 단순히 영화 텍스트 밖의 이야기가 아닌 레퍼런스로 느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인물이 대사로 늘어놓는 전사를 화면에 그대로 재연하는 게 아무리 타란티노의 오래된 습관이라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그 재연이 유독 길고 집요하다. 심지어 나래이션 까지 동원해 프레임을 대사의 시각화로 채워 놓는데 이는 기존의 타란티노 스타일이 아닐뿐더러 이런 식의 나열은 지루하고 실망스럽게 다가올 여지가 있다. 나는 이러한 나열들을 보며 9편의 연출작들 중 최초로 실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또 그 실화가 로만 폴란스키라는 살아있는 거인의 아픔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타란티노라도 부담스럽고 겁을 먹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나의 이런 얄팍한 짐작은 160분의 긴 러닝타임 중 마지막 10분을 남겨놓고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왜 영화를 다루는 영화인가, 왜 맨슨 사건인가, 왜 제목이 옛날 옛적 헐리웃 이야기인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평소 자극적인 폭력 묘사와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대사로 유명했던 타란티노는 사실 사려깊음이라는 정서와는 거리가 먼 감독이었다.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피 튀기는 오락성으로 주목받았던 타란티노는 이 영화를 통해 헤모글로빈을 빼고 그냥 ‘시인’이라 불려도 충분할 정도로 사려 깊은 연출을 보여준다. 특히 샤론 테이트를 다룰 때 단순히 비운의 피해자가 아닌 연기자로서의 꿈을 가진 유망한 배우, 이웃을 걱정하는 따뜻한 한 명의 사람으로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타란티노 답지 않은 뭉클함이 있다. 진짜 영화광이기 때문에 바칠 수 있는 추모와 위로는 이런 게 아닐까.


사려깊음과 뭉클함이 있는 영화라 해도 이 영화의 감독은 결국 타란티노다. <바스터즈>의 한스 린다&쇼산나 식당 시퀀스, <장고>의 아내 흥정 시퀀스에서 보여준 폭탄 같은 시퀀스가 <원스 어 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에도 있다. 그리고 타란티노의 9편 영화들 중 가장 재미있는 영화는 아닐지언정 가장 웃긴 영화는 이 영화라고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샤론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 릭은 현장에서 연기를 하고 부스는 고장 난 티비의 안테나를 고친다. 우리에겐 끝내주는 연기를 보여줄 릭 달튼이 필요하고 화끈한 액션을 보여줄 클린트 부스가 필요하며 꿈 많고 따뜻한 이웃 샤론 테이트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걸 프레임에 담아 펼쳐줄 영화라는 세계가 필요하다. 뻐킹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가 필요한 이유가 <원스 어 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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