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너무 두터운 경계선
한국에 와서 여러 커뮤니티에 들어간 후 굉장히 많이 보는 단어가 바로 Roles & Responsibilities (R&R)이다. 사실 이 단어는 회사에 지원할 때 Job description에서나 가끔 보는 부분이었지, 사실상 이 단어가 업무 중에 언급이 자주 되거나 문제로 떠오른 적은 크게 없다. 요새는 채용과 승진 등의 추가적인 업무로 이 부분에 대해 훨씬 더 많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딱 한번 R&R 관련 문제가 있었다. 이전 회사에서 개발 리드가 내 매니저가 됐는데, 나에게 본인이 바쁘니 본인이 일하는 branch에 버그가 있는 거 같으니 찾아서 고쳐라, 등의 선을 넘는 일을 시켰다. 물론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다. 이때 이 매니저는 입사한 지 4개월도 더 된 나의 직무가 뭔지, 뭘 하는 사람인지도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었고, 결국 수차례의 대화 후 수습기간 사이에 내가 먼저 사표 내고 나왔다.
이런 일이 흔치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한국에선 유독 R&R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느낌이다. R&R이 명확하지 않아요, 이 일을 내가 하는 게 맞나요? 이 일을 왜 제가 해야 하죠? 등의 이야기들이 많이 올라오는 걸 보고 있다. 왜 그럴까 굉장히 궁금했다.
개인적으로 느낀 건, 한국에선 R&R의 경계가 조금은 빡빡한 느낌이 있어 보였다. QA는 QA만. 물론 QA가 택배 상자 포장하고 있고, 옷 세탁하고 있으면 문제가 크다. 회사는 생각보다 여러 가지 이유 (비용, 규모, 인력 등)에서 같은 분야라도 R&R이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 QA가 배포를 하게 될 수도 있고, 개발자가 배포를 하게 될 수도 있다. 몇몇 R&R에 대해 일반적이지 않다, 바람직하지 않은 R&R이다 등의 의견들도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바람직한 R&R일까?
우선 R&R이 확실히 정의되고 유지되면 좋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가 커지거나 작아지면서 변화에 따른 R&R 변경 또한 언제든 생길 수 있다. 이 부분을 매번 서류로 정의하여 계약서를 업데이트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가장 중요한 건, 흔히들 말하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그리고 바람직한 건 코어 부분이 아닐까 싶다. QA라면 QA 업무 관련 내용이 R&R에 있어야겠다.
한국에서 가장 흔한 문제가 QA 포지션에 테스터의 R&R만 존재하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 테스터 포지션에 이름만 QA로 꾸며놓은 케이스이다. 혹은 내가 QA인데 QA 업무는 하나도 없이, 개발 또는 다른 일만 한다면 이는 문제가 된다. QA 포지션에 개발도 원하고, 제품 관리까지 원한다면 이건 QA를 찾는 게 아니라, QA라는 직책 이름으로 연봉을 낮추고 사람은 굴리고 싶어 하는 회사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QA 관련 업무를 주로 보면서 부가적으로 다른 업무도 담당한다면, 관련성이 아예 없지 않거나 배보다 배꼽이 크지 않은 이상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된다. 코어 부분의 R&R이 명확하고 이게 주가 되는 회사라면, 그 외 조금 더 부수적인 R&R은 오히려 내가 다른 분야들에 경험을 쌓을 수 있고, 다른 분야로 변경도 해볼 수 있는 기회로,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또한 회사의 문화라고 생각한다. 개발자의 문화는 최근 들어 많이 발전하고 좋아졌다지만, 이런 부분을 봐서는 QA는 아직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업무를 하면서 좋아하는 모토 중 하나가 Support Each Other이다. 다른 사람의 메인 R&R도, 서로 도움으로서 서로 배우고, 병가 또는 휴가로 인한 개개인의 부재가 R&R blocker가 되지 않고 업무를 원활히 진행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팀원들끼리 업무를 하면서 실 업무 외 여러 가지 부수적인 R&R이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미팅의 facilitator와 secretary, 채용담당 등 굉장히 많아서, 한 페이지에 이러한 부수적인 R&R들을 나열하고 팀원들과 협의하여 배정하고, 필요에 따라 몇 가지 R&R들은 주기적으로 변경하게 된다.
결국 중요한 건 윗선에 있는 매니저가 단순히 QA 포지션의 R&R만이 아닌, QA 부서와 팀 자체의 전체적인 R&R를 추려내고 관리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개개인의 R&R보다는 팀과 부서의 담당 R&R을 명확히 하는데에 더욱 집중해서, 모든 팀원들이 커리어적으로 문제가 없고 개개인에 최대한 적합한, 업무에도 큰 지장이 없는 R&R 배정을 할 수 있고 유지 또한 수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