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에 대해
거두절미하고 두괄식으로 말해보면,
A입장에서의 B의 행위가 폭력이고 B의 입장에서 A의 행위가 폭력이라면, 솔로몬의 지혜는 무엇이 솔루션인가? '반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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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가 위대한 이유는 단순 채식주의 그 자체에 집중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본질은 '상식'과 '사회'라는 거대한 틀에 대한 이야기를 풀고자 '비상식'의 대표격인 채식주의를 활용했을 뿐이다.
육식 사회에서 채식을 하는 것, 인륜을 어기면서 예술적 성취에 도달하려는 것은 상식을 넘어서는 행위다. 이 흐름을 거스르려는 개인은 결국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는 게 현실이다. 인류 역사에서 이러한 사람들은 적지 않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재평가와 찬사를 받기도 한다.
<몽고반점> by 브런치 '이건우'
"영혜의 자해를 목격한 그녀의 형부. 어느날 그녀에게 몽고반점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욕망을 들끓는다. 속세의 때를 타지 않은 그 순수함을. 성인이된 후 대부분 사라지는 그 반점을 탐하게 된 그는 정신병원에 갖다온 영혜를 불러낸다. 그는 그녀의 몸에 피어난 순수의 열매를 따먹는다. 본인의 성기를 꽃의 수술로 위장하곤 그녀에게 주입한다. 이때에도 그는 그녀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영혜가 아니라 그가 잃어버린 그녀의 몽고반점, 어린시절의 순수일 뿐이니까."
여기서 많은 독자들이 혼란에 빠진다. 비판의 대상이 단순 미친년이 되어버린 영혜에서 아내를 속이고 처제와 관계를 맺은 형부로 바뀌는 것이 불편한 것이다. 독자들이 혼란에 빠진 이유는 애초에 우리가 이 책을 접할 때 부터 '선과 악' 이분법적 사고로 읽기 시작하여 어느덧 남편/형부/언니의 입장에서 상식을 벗어난 영혜를 악으로 구분짓기 시작했는데, 더 깊이 파고들어갈수록 누가 악인지 혼동이 느껴졌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상식'에 대해 무비판적이고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으며 건드려서는 안되는 당연한 무언가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상식을 벗어난 '소수 생명체'들은 어디에서나 무시와 폭력이라는 상처에 베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지만, 정말 우리는 타인에 대해 어디까지 이해와 인정을 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 보편적이지 않은 사고와 행동이 오히려 보편적인 모습을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상처와 폭력을 주는 게 아닐까?란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생각을 서두에 분명하게 말했다. '반반'
이분법적인 '다수결'도 '독재'도 정답이 아니다. 존중과 조율이 지혜로운 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