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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은둔자 Mar 29. 2022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과 모네의 수련 연작 2

모네의 수련 연작과 모네의 아뜰리에 지베르니 이야기

모네의 수련 연작은 모네가 노르망디 지방의 지베르니로 1883년에 이사를 한다. 

모네는 1840년에 태어났고,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나폴레옹 3세의 치하(1848-1870)와 이후 1차 대전 발발 이전까지의 벨 에포크 시대이다. 그때는 나폴레옹 3세가 식민지를 확장하고, 우리나라와 연관된 부분은 이때 바로 1866년의 병인양요가 있었는데, 바로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침략을 했던 것이다. 

당시의 파리는 기술과 산업이 발달하고, 식민지 착취를 통한 부가 쌓이고, 나폴레옹 3세가 오스만 남작에게 파리를 대대적으로 재정비하도록 요구한 시기였다. 19세기 후반, 모네가 1877년 파리의 최초 기차역인 생 라자르 역의 증기 기관차를 8개의 작품으로 남긴다. 증기 기관차가 뿜어내는 역을 가득 메우는 증기와 당시 기술의 압도적 위력을 실감하게 하는 거대한 기관차의 위풍당당한 모습의 인상을 담았다. 

1886년에는 밭에 쌓아놓은 건초더미를 한낮, 석양, 눈 온 후 등의 다양한 시간과 시기를 그리며 25개의 연작으로 남겼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연작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891년에는 미루나무 연작을, 1892년부터 3년간은 노르망디 루앙시의 대성당 연작을 30여 점 그린다. 전시회에서 큰 성공을 거둔 1899년부터 1904년 사이에 그려진, 런던의 국회의사당 연작과 테임즈강 모티브의 작품들도 있다. 이때는 모네의 둘째 아들 미쉘이 런던에 정착하여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방문을 했던 시기이다. 


1899년부터 1904년에 그려진 런던의 국회의사당과 테임즈강의 채링크로스 다리 풍경 (위키피디아)


1896년부터 1897년에는 자신의 집 지베르니의 정원에 집중하여, 정원의 조성을 본격화하는 동시에 정원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된 지베르니 정원 그림은 그가 죽는 순간까지 지속된다.


지베르니에 이사를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모네가 함께 살고 있는 알리스 오슈데의 남편이 여전히 건재했던 때문이다. 19세기 말은 지금처럼 이혼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사실혼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파리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비난을 받으며 지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물론 모네가 야외에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작업실과 모네의 두 아들, 알리스의 여섯 아이들이 모두 함께 지낼 수 있는 저택이 필요하기도 했다. 모네는 7년 후에 지베르니를 구입하고, 본격적으로 연못을 파고 정원을 조성해 나간다.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1926년 죽음을 맞기까지 43년간을 거주하고, 작업을 했다.


노르망디의 지베르니, 모네가 43년간 살았던 곳 (위키피디아)


이곳 정원을 관리하기 위해서, 모네는 7명의 정원사를 고용했고, 그중 한 명은 장미와 수련 위에 떨어진 물방울과 먼지를 제거하는 일만 전담하기도 했다. 모네의 정원에 대한 애착, 그리고 완벽주의적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당연히 정원에 심는 꽃과 나무, 연못에 심는 수련과 연꽃의 수종도 세심하게 선별한 것이다.

모네는 연못과 수련을 그릴 때 일본 다리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지베르니의 연못과 일본 다리 (위키피디아)


1898년 작. 수련이 핀 연못의 녹색 하모니 (위키피디아)


1909년 전시를 위해 1904년-1906년에 그려진 수련 연작 (위키피디아)



오랑주리 미술관에 즉, 국가에 헌정한 수련 연작은 모네가 말년에 백내장으로 시력이 점차 약화되는 어려움을 극복하며 끈질긴 집념으로 작업을 하여 완성한 작품이다. 그를 독려하며 옆에서 함께 한 이가 바로 모네의 절친으로 알려진 조르쥬 클레망소(1841-1929)이다. 클레망소의 권유로 백내장 수술을 두 차례나 하면서, 건강상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작업을 마친다. 

모네가 국가에 바친 수련 연작은 1차 대전의 종전을 기념하며, 전쟁의 승리를 위해 화가로서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라는 사명감으로 마무리한 작품이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1927년에 모네의 수련 연작을 전시하며 개막식을 여는데, 이때는 모네가 이미 사망하고 6개월이 지난 때였다. 모네의 빈자리는 그의 친구이자, 당시 내각의 국무총리였던 클레망소가 지키고 있었다. 


오랑주리 개관식 때의 클레망소(짙은 회색 양복에 지팡이를 집고, 왼쪽을 행함) (자료: 오랑주리 미술관)


지베르니는 정원뿐 아니라 집도 다양한 색으로 가득 차 있다. 모네를 빛의 사냥꾼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것도 그의 삶의 궤적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모네가 죽고, 그의 관을 검은 천으로 덮었을 때, 클레망소가 그것을 보고, 검을 천을 걷어내고 알록달록한 천으로 덮으며, '모네에게 검은색은 가당찮지!'라고 했단다.

모네의 유산은 유일하게 남은 둘째 아들 미쉘에게 상속된다. 그러나 미쉘은 아프리카를 떠돌며 사냥하고, 지베르니에는 관심이 없었다. 지베르니는 모네의 첫째 아들과 결혼한 블랑슈, 즉 알리스의 딸이자 모네의 의붓딸이 1947년 죽기 전까지 정원과 함께 돌본다. 그녀가 죽고 나서, 지베르니는 방치가 되고 정원은 잡초로 무성해진다. 미쉘은 1966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는데, 유서에 지베르니와 아버지의 작품들을 보자르 아카데미에 기증을 한다. 1980년 모네 재단이 세워지고, 같은 해 6월 지베르니는 대중에게 공개된다. 모네의 컬렉션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은 "마흐몽탕 모네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은 1990년 파리 16구에 위치한 나폴레옹 1세 시대의 보자르 예술품과 미쉘이 기증한 모네의 작품이 전시된 곳이다.

이 미술관은 예술 역사가인 폴 마흐몽탕이 자신의 저택과 그가 수집한 르네상스 컬렉션, 나폴레옹 1세 때의 작품들을 보자르 아카데미에 기증하면서 만들어진 곳이다. 


블루뉴 숲에서 가까운 파리 16구에 위치한 마흐몽탕 모네 미술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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