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슈타이너 학교 시절에 만난 그녀
캠프힐마을이 제2회 오티즘 엑스포에 참가했습니다. 발달장애인을 위해 애쓰고 헌신하는 모든 사람들이 2년에 한번 모이는 행사입니다. 코로나가 잠잠한 시점을 맞이하여 모처럼의 대규모 행사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페북에서 만났던 부모님들, 같은 길을 걸으며 발달장애인의 삶과 미래를 고민하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지요.
우리 빌리져들이 다음 주에 1주일의 여정으로 여름휴가를 계획하고 있는데 여행비를 번다고 아직 오픈하지 않은 캠프힐베이커리에서 땅콩쿠키를 만들어 팔기로 했습니다. 긴 장마로 인해 지하수 모터가 침수되는 바람에 단수가 되어 정신이 하나도 없던 날이었지만, 맛나게 쿠키를 만들어 싣고 행사장으로 향했습니다. 북적북적, 시끌시끌.. 참으로 오랜만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저는 양평에서 조용히 살아서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고 기가 다 빠져나간 것 같았습니다.
행사 오픈을 하자마자 많은 분들이 방문해 주셔서 인사를 나누느라 분주했고, 그 와중에 열심히 쿠키도 팔아 결국 오전이 지나자 완판을 하게 되었고, 갖고 간 소식지, 엽서도 모두 소진했지요. 덕분에 오후에는 조용히 책을 읽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은 하이타니 겐지로의 '상냥하게 살기'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양평 캠프힐마을에서의 일상을 소소하게, 혹시 심심하게 써볼까.. 하는 모처럼의 글쓰기 의욕이 생겨났습니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오간 가운데 한가하게 책을 읽고 있던 와중에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슈타이너학교 시절 학부모였던 석진이 어머니였지요.
석진이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슈타이너학교로 전학을 왔던 아주 친절하고 신사적인 남학생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양평까지 지하철을 타고 6년을 다녀 슈타이너학교 최초의 고등학교 3학년 졸업생이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부모에게 있어 자녀의 학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도 많지 않을 텐데, 더구나 초등학교 졸업장도 마다하고 6학년 2학기에 다니던 공립학교를 그만두고 앞으로 망해 문을 닫을지 어찌 될지 모르는 한 학급 학교인 장애아동을 위한 대안학교 '슈타이너학교'로 편입을 한 것이지요.
석진이 어머니는 석진이의 뇌전증을 몹시 안타까워했고, 그녀 스스로 CST(두개천골요법)을 공부하여 슈타이너학교 학생들을 위해 도움을 줄 정도였습니다. 여러 면에서 저와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철학을 같이하였고, 늘 잔잔한 웃음으로 저를 지지해 주셨습니다. 대안학교에 지원하는 일부의 부모님들이 그렇듯이 어떤 면에서 과하게, 어떤 면에서 일방적으로 학교의 행. 재정적 문제와 심지어는 교권 문제까지 힘겹게 하던 때에는 늘 중립적인 입장에서 교사회를 말없이 지지해 주었지요.
그런 그분의 그 잔잔한 미소가 그 당시 가정사와 학교의 내분 문제로 힘겨웠던 저에게는 백 마디의 말보다 힘을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슈타이너학교의 모습을 기대하며 우리 부스를 찾아 방문해 주셨습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게 '슈타이너학교는 망했어요'라고 웃으며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젖은 목소리를 내며 조금은 깔깔거리며 내 뱉곤 했습니다. 괜스레 슬픔을 감추고자 말입니다. 그러나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미 5년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슬픔과 아쉬움보다는 시원함이, 그리고 그 시절이 참 행복했음을 상기하게 되었지요.
석진이와 함께 그 당시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통학을 했던 학생 중에 우리보다 먼저 다른 별로 떠나버린 승민이, 구리에서 통학을 하던 재익이, 덕소에서 전철팀에 합류했던 맏누나 성희... 이들은 슈타이너학교가 막 문을 열었던 봄, 가을에 입학과 편입을 해왔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 때, 슈타이너학교 교사 월급은 80만원, 주중에는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주말에는 펜션을 하며 부족한 학교 운영비를 벌었던 그 시절의 학생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똘똘 뭉쳐서 서울에서 양평까지 경의중앙선을 타고 통학을 하였지요. 기사가 없던 탓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남편에게 물려받은 중고 코란도 승용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부지런히 전철 시간에 맞추어 아신역을 향해 달려갑니다. 방지턱을 만나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준비하시고~~~~ 덜컹!!!'을 하면 아이들은 온몸이 공중에 들렸다 '쿵!'하고 내려앉자 '아~~~ 악~~~' 하고 함성과 탄성을 지르곤 했습니다. 저는 더욱 장난스럽게 몇 번이고 더 스릴 있게 아이들에게 놀이동산을 체험하게 했지요. 그렇게 달려 아신역에 내려 주고 학교로 돌아오는 그날은 양 길가에 노란 은행잎이 물들어 황금빛을 내는 때였습니다. 문득 '그래... 어쩌면 지금이 내 인생의 최고로 아름다운 날이라 언젠가 돌아볼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 그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름다운 날들이었습니다. 아무런 미래를 예견할 수 없었지만, 건강했고 그저 돈 들지 않고 할수 있었던 기대와 희망만이 있었지만 불안하지 않았고, 순간순간 아이들과 숨 쉬고 웃으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아침이면 아이들은 리코더를 불며 운동장을 거닐고, 저학년 아이들은 어딘가에서 후원받은 중고 적목에 오르며 성장을 뽐내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자전거 타기를 매일매일 연습하여 드디어 자전거를 신나게 타기 시작하여 온 가족을 기쁨으로 흥분시켜 떡을 해 날아와 파티를 열었던 그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해인가 그다음 해인가는 한여름 낮 닭이 울음을 울어 운동장을 가득 채웠던 평화가 그득했던 그때였습니다.
석진이 어머니와 옛날 슈타이너학교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며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석진이가 참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슈타이너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당당하고 멋진 인생을 살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 이 말씀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고... 저는 석진이가 슈타이너학교 학생이어서 저를 비롯해서 많은 동생들과 누나들...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더 많이 행복했던 것 같아요. 우리에게 기쁨을 몰아주었던 석진이였잖아요.."
정말 그랬습니다. 석진이는 8학년 연극 공연을 마친 후에는 연극 대사를 외워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나서 "아주 맛나게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전하곤 했습니다. 교육의 힘이 이렇게 크고 위대함을 석진이 덕분에 순간순간 많이 느꼈던 시간이었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봉고차에 몸을 싣고 팔당대교를 넘어오는데 백미러로 보이는 서쪽 해넘이는 아름다웠고, 팔당 저수지의 물길을 스치며 불어오는 여름 바람은 시원했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벅차오름을 느끼며 지금도 그때처럼 여전히 행복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슈.타.이.너.학교.... 2009년 저를 열정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그리고 2017년 초에 찬란한 슬픔으로 빠뜨렸던 그 이름... 그 시절도 돌아보니 그리 나쁘지 않았고, 가끔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 아무도 가지 않는 그 험한 길에 발을 잠시 걸쳐 놓았는지 낯선 저를 만나게 됩니다.
돌아보니 아마도 그 시절 석진 어머니 처럼 잔잔한 미소로 지지해 주었던, 말없이 마음으로 통했던 그런 분의 응원 덕분에 행운처럼 빛나는 시간을 갖게 되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