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닥터 와이 May 03. 2019

환타와 코드 블루

"오늘은 왠지 별일 없을 것 같다"는 내 말은 정말이지 엄청난 실언이었다

<오전 8시>


1번 베드: 최XX (남/84) - 호흡기 내과: 폐렴

2번 베드: 김OO (여/83) - 신장 내과: 감염성장염, 위장관출혈(?)

4번 베드: 안 Δ Δ (여/66) - 호흡기 내과: 폐렴

5번 베드: 변XX (남/83) - 호흡기 내과: 흡인성폐렴, 파킨슨병, 치매

7번 베드: 최OO (여/81) - 신장 내과: 급성신부전, 감염성장염

8번 베드: 노 Δ Δ (여/65) - 소화기 내과: 소화성궤양천공, 역류성식도염, 당뇨병, 만성신부전, 고혈압

9번 베드: 김XX (남/82) - 호흡기 내과: 폐렴, 심방세동


 나는 별 내용 없는 환자 명단 쪼가리 하나를 손에 들고 펄럭이며 콧노래를 불렀다. 오늘따라 중환자실로 통하는 긴 복도로 들어서는 기분이 좋았다. 이례적으로 중환자실 환자들의 상태가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복도는 수술실에서 나오는 중환을 빨리 중환자실로 들이기 위해 만든 1자형의 길이었는데, 예전에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상태 나쁜 환자들에게 가까이 가는 힘든 시간을 의미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입원환자 수는 총 일곱으로 감당할 만한 숫자였고, 모두 그다지 심하지 않은 증세, 문제가 있더라도 모두 예측가능한 것들이었다. 오늘은 별 문제 없이 잘 넘어갈 것 같은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간호사 선생님들, 좋은 아침입니다!"

 "뭐야, 선생님 오늘 왜 이렇게 기분 좋아요?"

 "하하하. 왜 좋겠어요? 오늘 왠지 별 일 없을 것 같은 날 아닙니까? 신환 하나 없을 것 같은 기분!"

 "아니, 그게 무슨 망언이에요! 그런 막말 하지 말아요!"

 "아녜요. 오늘은 진짜 별 일 없을 거예요. 나는 미신 같은 것 안 믿으니까!"


 현대 과학의 꽃인 의학을 다루는 의료인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거의 모든 병원에 미신적 금기나 법칙이 있다. 예를 들자면 '환자가 적다, 별 일 없다.' 이런 말을 하면 그 즉시 환자가 몰려 들어닥치거나 중한 사건들이 빵빵 터지는 일, 이상하게 환자를 많이 보거나 중환을 맡는 동료가 있다면 그를 '환타선생'으로 지정하는 일 들이다. 이는 '환자를 탄다.'는 은어로, 삼국지에서 관우를 수술한 중의학의 전설 '화타 선생'급으로 환자를 끄는 힘이 있다는 대우를 받는다. 오늘 이상하게 많은 일이 생기는데 만일 '환타 선생'의 당직일이라면, 환자가 많은 이유가 명백히 설명이 가능하다. 바로 '환타 선생'이 강림했기 때문이고, '환타 선생'이 모든 현상의 주범이다. (독자 분들도 눈치채셨겠지만 결코 긍정적인 의미에서 쓰이지 않고 힘든 노동의 원흉을 장난스레 비난하기 위해 쓰인다.)


 나는 전공의 1년차 때 유명한 환타였는데 실제로 내가 무슨 일을 맡기만 하면 일이 터졌다. 누구는 편하게 공부할 것 다 하며 근무하고, 나는 항상 하루종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근무 막판에는 쓰러질 정도이니 상대적 박탈감이 컸다. 덕분에 실력이 는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지쳐 누운 당시에 그런 긍정적 효과를 알아챌 리 없었다. 교수 중에서도 전직 환타가 있었는데, 그 분과 내가 팀이 되었을 때 환자 수가 갑자기 폭증하자 "양 선생이 문제 아닌가?" "아닙니다. 교수님 기운 같습니다."하며 서로를 탓하기도 했다. 아무튼 환타로 소문난 내가 '환자들이 안정적이니 좋다.'는 말을 했으니 간호사들이 불안할 만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좋은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좋을 것 같은 시작이었으니까. 날씨도 따뜻했고 응급실 내원환자도 수가 적어 안심이 되었다.


 내가 일하는 병원은 중환자실 입구로 들어가면 좌우 방향으로 내과계와 외과계 중환자실로 나뉜다. 내가 맡는 내과 환자들은 대부분 내과계로 입원하지만 자리가 다 차면 건너편 외과계로 가기도 한다. 둘 사이 간격은 대략 30미터 정도 된다. 오늘 내과계 중환자실은 내과 환자 7인과 신경과 환자 3인이 있었고 세 자리나 비어 있는 여유가 있었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중환자실 컴퓨터 앞에 앉아 커피까지 내려 마시며 환자 파악을 하고 처방을 냈다. 한참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호흡기 내과 교수였다.


 "네, 교수님. 어쩐 일이십니까? 오늘 토요일이라 출근 안 하시는 날 아닙니까?"

 "병동에 서OO님이라고 너 알지? 요 며칠 숨 쉬는 게 영 불안했거든. 1년차한테 전화왔는데 오늘 역시나 별로고 더 나빠지실 것 같다. 이러다 호흡부전 오면 안 되니까 네가 좀 보다가 오늘 기도삽관 고려해 봐."

 "알겠습니다."

  

6번 베드: 서OO (남/75) - 호흡기 내과: 폐렴


 나는 명단의 공백에 쓱쓱 환자가 내려온다는 표시를 했다. 내 전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간호사 하나가 "선생님이 아까 신환이 없을 것 같다느니 그런 말 하니까 바로 내려 오잖아요."하고 농담처럼 던졌다. 나는 "이젠 그런 일 더 없을 거예요. 이 환자도 기도삽관하고 땡인데 뭘."라고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진짜 그럴 줄 알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전화 받았던 환자가 전실해 왔다. 듣던 대로 호흡이 불안해 바로 기도삽관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바로 진정제를 투여하고 자세를 잡고 도관을 기도로 넣었다. 기계호흡을 연결하고 세팅을 환자 개별맞춤으로 설정했다. 하지만 경과는 봐야 했다. 개별맞춤이 계산된 값으로 정한 것이기는 하지만 적절하지 않은 경우도 왕왕 있기 때문이다. 나는 1시간 정도 후 경과를 보기로 결정 내렸다.


 그 때 였다. 전체 원내방송이 크게 울렸다.


 「코드 블루 (Code blue: 원내 심정지 상황), 코드 블루. 심혈관 촬영실.」


 심혈관 촬영실이면 중환자실 바로 옆이다. 밖으로 우당탕탕 나를 제외한 내과 의사들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궁금했지만 나는 중환자실을 지켜야 했기에 나가볼 수 없었다. 옆에서 간호사들이 이 상황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저 코드 블루 뭐야?"

 "아까 응급실 있던 흉통환자 같은데? 심도자술 하다가 어레스트(Cardiac arrest: 심정지) 났나 봐."

 "응급실에 흉통이 있었어? 난 전혀 몰랐네."

 "우리 베드 둘 비었나? 저기 배정하면 되겠네."


 나는 이 때부터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원내 심정지, 살아난다면 무조건 중환자실로 실려 온다. 어깨만 무거워지면 다행인데 불안하기까지 했다. 밖으로 나가볼 수가 없으니 어떤 상황임을 알 수가 없었다. 누가 심혈관실에 가 있는지도 모르니 아무에게나 연락할 수도 없고, 기록이라야 '흉통'밖에 없는 응급실 차트 외엔 환자파악에 참고할 자료가 없었다. 인계받기 전까지 어떤 환자일지 눈 감은 상태로 기다려야만 할 심정이 불편했다. 옆에서 간호사 하나가 "그러게 아까 왜 쓸 데 없는 말을 해가지고."라고 타박했다. 나는 "그러네요.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라고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답답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데 내 옆으로 뭔가 서 있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1년차 한 명이 내 기분이 저기압인 걸 알아채고 슬슬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고 있었다.


 "뭐야, 중환자실 전실인계 하러 왔나요? 벌써 심혈관실 상황 끝났어요?"

 "중환자실 전실인계는 맞는데요. 심혈관실 심폐소생술 환자는 아닙니다."

 "신환이 또 있다고요?"


 아무리 ‘실언'이라지만 한 시간도 채 안 되었는데 벌써 세 명째라니! 내려올 이 환자는 며칠 전 호흡이 불안해 중환자실에서 몇 일 경과를 보다 병실로 올라간 50대의 심한 간질성폐질환 환자였다. 1년차에 따르면 기계호흡에 의존적으로 될 가능성 때문에 지금껏 아껴 왔는데, 역시나 기도삽관을 다시 고려할 상황이 된 것이었다. 인계를 받고 있는데 환자가 실려왔다. 빼빼마르고 키 작은 남자였다. 환자는 고농도 산소를 걸고 침대째 실려 왔다. 숨 쉬는 양상이 불안한 건 사실이었지만 숨 넘어가기 직전의 상황은 또 아니었다. 언제 기도삽관 해야 할 지 잘 판단이 서질 않았다. 1년차에게 이 점을 물었더니 "교수님은 오늘 중으로 기도삽관 하는 게 좋겠다고 하십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지금 심혈관 촬영실에서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는 환자가 급하니, 그 환자를 파악하고 기도삽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명단에 한 줄이 더 생겼다.


3번 베드: 김 Δ Δ (남/55) - 호흡기 내과: 간질성 폐질환




<오전 10시>


 또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웬만한 원내 번호는 다 가지고 있었지만 외래 번호만은 아니었다. 보통 외래는 교수 진료실로 연결되므로 환자 보고 있는 바쁜 방으로 전화걸 일은 없기 때문이다. 임상적 조언을 구하려 찾을 용건이 있다면 거의 항상 직접 방문해야 했다. 그런데 외래에서 직접 전화가 왔다는 건 필시 중요한 할 일이 생겼다는 것, 아마도 신환일 가능성이 높았다.


 “양 선생, 내가 방금 정형외과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뭐 급한 환자가 있다나 봐? 우리 투석하는 아주머니라고 하고, 변비로 관장 여러 번 했고 오늘 구불결장 내시경 한다는데, 상태가 어떤지 내가 지금 가서 보기는 좀 어려울 것 같거든? 소화기 내과에서 와서 하는 얘기 좀 들어보고, 여튼 전과는 받아주기로 했는데 오늘 좀 잘 봐 줘.”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좀 버거운 기분은 있었다. 지금 내려온, 그리고 곧 올 환자까지 감안하면 오늘 할 일은 차고 넘칠 것 같았다. 나는 내 능력이 달릴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 재빨리 내과 의국 동기에게 전화를 걸어 구원을 요청했다.


 “동기사랑, 동기사랑. 나 좀 도와 줘. 오늘 오후에 일정 있냐?”

 “지금은 별 이벤트 없는데요. 이따가는 여자친구랑 영화보기로 했고요. 형, 무슨 일 있어요?”

 “오늘 망한 것 같아. 환타 주제에 내가 ’오늘 환자 없다!’고 뇌까려서. 빨리 좀 내려와서 도와 줘.”

 “지금 갑니다.”


 전화를 마칠 때 즈음 저승 입구에서 돌아 온 코드 블루 환자가 급하게 실려 들어왔다. 가장 긴장되는 환자였다. 그런데 그의 침대를 끄는 이송요원은 내가 있는 내과계 중환자실에 아닌 외과계로 바퀴 방향을 돌려 갔다. 나는 옆 간호사에게 이유를 물었다.


 “여기 자리 있는데 왜 외과계로 가죠?”

 “아까 정형외과에서 전과 올 사람 입실하니깐. 그 사람 우리 내과계 중환자실로 배정했어요.”


 그 때 1년차 레지던트가 뛰어 왔는지 숨을 턱에 달고 나타났다.


 “역시 심근경색이었어요. 아까 코드 블루 뜨긴 했는데 다행히 압박 없이 곧 회복됐어요. 좌측 메인에

스텐트 넣었고요. 한번씩 심실조기수축이 지나가긴 하니까 리듬 유의해서 보십시오.”


 그렇게 오래 환자를 기다렸는데, 인계해 주는 1년차는 짧게 끝내고 중환자실을 홀홀 떠나버렸다. 아마도 응급실 때문에 바빴을 것이었고,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인계가 길어지면 듣고 있을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명단에 또 한 줄이 생겼다.


외과계 7번 베드: 오 Δ Δ (남/65) - 심장혈관 내과: 심근경색


나는 환자 인계를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을 정도였다

Photo by: Hector J Rivas on Unsplash




<오전 11시>


 바로 온다던 동기녀석이 생각보다 늦고 있었다. 그 녀석은 워커홀릭이다. 회식 끝나고도 환자 한 번 더 보러 오고, 퇴근하고 새벽에도 가끔씩 차트를 열어보는 그런 의사였다. 지금까지 안 오는 건 뭔가 밖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나 하여 중환자실 밖으로 나가보니 역시나 정형외과에서 온 환자를 자기가 인계받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자기가 파악한 모든 내용을 정리해 풀어 놓았다.


 “형, 뭔가 이상해요. 잘 파악이 안 되는 환자에요. 말기신장병으로 혈액투석 월수금 하시는 분이라는데, 그래서 신장내과로 전과 의뢰 온 거고요. 1주 전에 골절로 정형외과에서 수술하셨고 이후에 누운 상태로 지냈는데, 원래 만성 변비가 있었대요. 하던 대로 관장했는데 변비 여전하고 복통도 있고. 환자 원해서 구불결장 내시경을 아까 했는데 별건 없었다네요. 엑스레이는 관장 시작전인 3일전에 하고 그 다음 경과는 없고요. 근데 너무 배 아파하네요.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대요. 장음은 그저 그런데. CT고려해 볼래요?”

 “그래, 뭐. 일단 엑스레이 찍어보지. 안으로 들이자.”


12번 베드: 정OO (여/85) - 정형외과 (신장 내과 전과예정): 말기신장병, 원인 불명 복통.


 한편 환자를 데리고 온 정형외과 레지던트는 홀가분해 보였다. 그로서는 이런 환자를 데리고 있는 것이 꽤나 신경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내과로 전과를 가면 (해결해 줄 수도 없는데) 배 아프다는 말을 더 안 들어도 되니 얼마나 좋을까. 안도하는 그 앞에서 나는 보호자에게 중환자실 입실과 관련해 이런저런 설명을 했다. 그 동안 동기 녀석은 인턴이 올 때까지 채혈을 기다리지 말자며 직접 채혈용 주사기를 들었다. 동맥을 찾기 위해 환자의 서혜부를 짚는 순간, 그는 눈을 휘둥그래 뜨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 잠깐만! 전과 받지 말아 봐요.”

 “갑자기 왜 그래?”

 “여기 만져봐요.”


 나는 그의 손가락이 짚는 부위를 만졌다. 깜짝 놀랄 만한 느낌이었다. 물렁한 살이 아니었다. 수 많은 공기 방울이 살 속에 묻혀 터지고 있었다. 피하공기증(Subcutaneous emphysema)! 뱃살과 허벅지살로 파고든 이 공기방울은 어디선가 새서 온 것이다. 몸 안에서 샌다면 어디서 오는 걸까? 가장 가능성 높은 곳은 장이었다. 장 어딘가에 구멍이 난 것이다.


 "말 되네. 정형외과에서는 처음 복통의 원인이 변비라고 봤어. 그간 만성변비가 있었으니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며칠간 관장까지 했는데 변비가 해결되지 않을 리는 없어. 장이 늘어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복막염이 복통의 원인이었을 거야. 빨리 CT찍고 랩(피검사) 결과를 보고 싶어지는군."

 "장천공이 문제라면 언제 구멍이 난 걸까요? 처음부터 변비가 아니라 장이 뚫렸던 거라면 분명 관장이 더 악화시켰겠네요."

 "게다가 오늘 내시경도 했잖아. 내시경하면서 공기 들어갈테니 더 아플 수도 있지. 그리고 네 말대로 장천공으로 생긴 복막염이라면 외과에서 응급 수술해야지. 내시경에서도 안 보였으면 작은 구멍이었을 것 같아. 어쨌든 빨리 CT는 찍어봐야 겠네. 우리 과에서 받을 만한 환자가 아닌 건 확실하고 말이지. 정말 고맙다. 환자 잘 봤네."

 "빨리 정형외과측에 일반외과 접촉해서 수술 잡으라고 하죠."


 나는 정형외과 레지던트에게 내 의증을 설명했다. "장천공으로 인한 복막염, 패혈증으로 가면 환자는 죽는다. 빨리 수술해야 한다." 그는 사색이 되어 일반외과 외래로 달렸다. 분명 방금 전까지 내과로 보낼 생각에 안도했겠지만, 전과가 무산되면서 CT도 찍어야 하고 수술방도 잡아야 하고 그가 할 일이 많이 생겼다. 나는 그 동안 환자를 보러 갔다. 정형외과 환자지만 패혈증같은 내과적 문제는 내가 봐 주는 것이 환자를 위해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혈압이 떨어지고 있었다. 극도로 심한 패혈증이 쇼크로 이어지는 모습이었다. 이럴 때는 수액을 때려 부어야 하지만 투석환자니 투석을 하지 않으면 체액이 빠져나올 구멍이 없다. 게다가 숨 쉬는 것도 편해 보이지 않았다. 수액을 주면 몸이 붓고 폐에 물이 찬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나는 환자가 더 나빠지기 전에 빨리 CT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불안했다. 강박적인 기분도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결국 일주일이나 끊었던 버릇이 도져 버렸다. 나는 누운 환자를 앞에 하고 쉴 새 없이 손톱과 입술을 물어 뜯었다. 치료는 내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 혈압이 올라가지 않았다. 나는 결국 승압제까지 달기로 결정했다. 혈관이 나빠 주사제 연결하려면 여러 번 찔러야 하는 환자에게 또 약 하나를 달 생각을 하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오>


 "양 선생님, 새츄레이션(O2 saturation: 산소포화도)!"


 CT촬영을 하고 온 환자가 또 나빠지기 시작했다. 환자의 지속 생체신호 모니터링에 새로운 악신호가 떴다. 혈압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 미룰 필요가 없었다. 기도삽관을 해야 했다. 그 때 즈음 중환자실로 아직 퇴근하지 않은 내과 의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환자가 나빠진다는 소문이 병원내에 난 모양이었다.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내가 뭐라도 실패하면 주위의 동료가 도와 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거의 매일 기도삽관을 시행하던 차였다. 대부분 응급상황이었기에 할 때마다 실패의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내 손기술에 믿음이 있었다. 주위에서도 정말 잘 한다고 추켜 세워주기도 할 정도였으니 당연히 자신감 있었다. 하지만 이 환자는 조금 달랐다. 고도의 비만에 목이 짧아 기도가 잘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쉽지 않아 보였다.


 나는 환자의 입을 열고 쇠로 된 걸개를 기도 위쪽으로 집어 넣었다. 과연 후두덮개를 정확히 걷어 올렸음에도 기도가 잘 보이지 않았다. 예상대로 쉽지 않은 케이스였다. 두 세번의 실패가 연달아 발생했다. 나는 뻘뻘 땀을 흘렸다. 옆에서 보던 내과 레지던트 동기가 내게 말했다.


 "형, 내가 한 번 해볼까요?"

 "그래, 손 바꾸자. 잘 부탁해."


 고전하는 나를 돕겠다는 그의 심리는 다음과 같다. 나에 대한 선의나 환자를 위한 생각도 있겠지만 가장 우선되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마음이다. 의사는 기본적으로 치료자이기 이전에 의 과학자(醫-科學者)다. 이 과학자들은 풀지 못하는 문제나 해결 못하는 과학적(의학적) 난제를 보면 흥분한다. 공을 보면 물어야 직성이 풀리는 여느 강아지처럼, 어려운 일을 해결하고 싶은 순수한 의지가 마음 깊은 곳에 발동하는 것이다. 즉 그가 날 돕고 싶은 마음은 도전의식이다. 이 마음은 비록 한 줌의 선의가 없다 하더라도 언제나 도움이 되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숨길이 들어갈 구멍을 찾지 못했다. 이어 다른 내과의사들이 자기에게 넘겨 보라고 서로 손짓했다. 다들 자기만은 다를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결과는 실패-실패-실패-실패. 마취과에까지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환자는 그 동안 불안한 산소포화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기도삽관이 안 되니 급한 대로 후두상방까지만 접근하는 아이겔튜브를 박아 넣고 기도를 유지했다. 이 경우라면 기계환기를 할 수가 없어 인턴이 직접 고무로 된 앰뷰백을 짜야 했다.


 "이런, 환자가 너무 안 좋네."


 수술을 집도할 외과의가 중환자실에 나타났다. 어차피 응급 수술할 환자였기에 빨리 그에게 넘기고 싶었던 차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네, 교수님. 지금 기도유지가 안 되어 앰뷰배깅(앰뷰백을 짜는 행위)으로 버티고 있는데 최대한 빨리 기도삽관 해 보겠습니다. 조금 후에 응급의학과에서 와서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부탁해. CT봤는데 선생 말대로 장천공이 맞아. 다만 투석도 하는 환자고, 보호자들에게 잘못될 가능성을 충분히 경고해야겠네. 그리고 선생한테 부탁이 있어. 혈장 PT-INR이 너무 늘어나 있어. 출혈경향이 심하니 FFP(Fresh frozen plasma: 신선동결혈장)을 몇 개 주고 조절 좀 해줘. 이 정도면 칼로 째는 족족 지혈이 안 되어서 뱃 속을 피바다를 만들어 버릴 거야."

 "알겠습니다."


 호기롭게 대답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약이 들어가고 있었다. 주렁주렁 달린 수 개의 수액줄이 이를 반증했다. 가장 큰 문제는 더 이상 찌를 데가 없다는 점이었다. 혈관이 너무 나쁜 환자였다. 나는 중심정맥관을 삽입하기로 결정했다. 굵은 바늘을 큰 정맥으로 바로 찔러 넣어 주사제가 제대로 들어갈 경로를 확보하는 것이다. 만에 하나 바로 옆에 있는 동맥을 한 번이라도 찌르면 대량출혈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출혈을 막기 위해 출혈을 감내해야 하는 이 상황에 쓴 웃음이 났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마음이나 감정이 들어도 환자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어쨌거나 목숨을 건 사람은 내가 아니라 환자였기 때문이다.




<오후 2시>


 장천공 환자의 베드 넘버는 12였다. 다른 신환도 네 명이나 됐지만, 가장 상태가 나쁜 12번 구역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점심식사도 못 했지만 배고프지 않았다. 앰뷰백을 짜고 있는 인턴도 이젠 지쳐가고 있었다. 한 시간도 넘게 앰뷰백을 짜고 있으니 손에 쥐 날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 동안 응급의학과에서도 기도삽관을 시도했다. 그들 역시도 몇 번을 실패했다. 하지만 극심한 상황에서 많이 해 본 경험 때문인지 결국에는 삽관에 성공했다. 이제 인턴 선생은 앰뷰백을 놓을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정말 수고했다고 등을 두드렸다. 수술방에 보낼 수 있는 상태가 되자 이제 마음이 놓였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고 컴퓨터 앞 의자에 몇 시간만에 처음으로 앉았다. 그 때 한 간호사가 내게 한 마디를 던졌다.


 "너무 바빠 보여서 말씀 못 드렸는데, 우리 3번환자 기도삽관 언제 해 줄 거에요?"

 "아, 맞다!"


 결국 나는 1분도 채 못 앉고 다시 일어나 3번 베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환자가 힘들어 하며 숨 쉬고 있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제가 편하게 해 드릴게요." 라고 말하고 약으로 그를 재웠다. 나와 간호사는 필요한 키트를 준비하고, 그의 입을 열고, 후두덮개를 열고, 튜브를 기도 안으로 밀어 넣었다. 12번 베드에서 기도삽관 때문에 점심 내내 고생해서인지 굉장히 수월하게 느껴졌지만, 계속되는 사건에 몸이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제는 좀 피곤해 지려고 하네요."

 "그러게 아침에 왜 그런 말을 해가지고요. 환타면 환타답게 언행을 조심하세요."

 "무슨 말씀을! 이 환타가 다 살린다!"


 나는 일반적이지 않은 고성으로 나를 깨웠다. 긴 하루를 어떻게든 버텨야 했고, 지친 마음에 화이팅을 불어 넣기 위해서였다.


 그 때 저 멀리 외과계 중환자실에서 "양 선생님! 빨리 이 쪽으로 와 봐요!"라고 누군가 소리쳤다. 나는 외과계 방향으로 복도를 뛰었다. 등 뒤로 방금 이야기 나눈 간호사 목소리가 들렸다. "가서 환자 잘 살려 주세요, 환타 선생님-."


 "심실빈맥이에요. 여기 충격기!"


 오전 코드 블루의 주인공이 결국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내가 달리는 요 몇 초 간 이 능숙한 간호사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젤리 바른 전기 충격기를 건넸다. 나는 양 손의 버튼을 길게 눌러 충격기를 충전했다. 신호음이 울리자 환자의 가슴 양 편에 충격기를 대고 소리쳤다.


 "챠지. 모두 클리어, 치겠습니다."


 프슉하는 소리를 내며 전류가 환자의 몸통으로 빨려 들어갔다. 환자의 허리가 가볍게 들렸다. 나는 바로 모니터를 확인했다. 심장은 제 리듬을 찾지 못했다. 간호사들의 아- 하는 탄식이 들렸다. 더 많은 전류가 필요했다. 이번에도 클리어, 쇼크. 전류 들어가는 소리는 마치 기계음으로 된 천사의 휘파람 같았다. 심장이 정상 리듬을 되찾았다. 아-하는 한숨이 들렸지만 이번에는 안도의 날숨이었다. 나는 잠시 환자를 지켜 보다가 다른 환자들이 있는 내과계 중환자실로 발길을 옮겼다.


전기충격기에서 기계음으로 된 천사의 노래가 들렸다

Photo by: Joakim Honkasalo on Unsplash




<오후 4시, 그 이후의 일>


 오전 내내 함께 고생한 간호사들이 짐을 싸고 있었다. 3교대 근무 중 저녁 시간 근무(이브닝 턴)가 시작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브닝 간호사들이 오전부터 있던 많은 일들을 인계받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전 시간 간호사들은 인계 중간중간 "이게 다 주치의가 쓸데 없는 말을 해서."란 첨언을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그 즈음 완전히 탈진해서 의자에 눕듯이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불길을 정신없이 잡다 보니, 기계호흡을 하는 환자들을 신경쓰지 못해 수치 조절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나는 1분 쉬고 5분 교정하는 방식으로 버티고 있었다. 새로 온 환자들이 불안할 지언정 어떻게든 잘 버텨 주고 있어 다행이었다. 간호사들은 그런 나를 딱하게 생각하는 한 편, 환자의 상태악화도 걱정했다.


  그녀들의 걱정은 일리있는 것이었다. 저 멀리 외과계 중환자실의 환자는 이후로 심폐소생술을 두 번이나 겪어야 했고, 내과계에서도 심폐소생술이 한 차례 있었다. 오늘 기도삽관한 환자 모두는 산소 교통이 잘 되지 않아 포화도 하락을 경험했고, 그 중 한 명은 진정제 ‘약발’이 떨어질 때쯤 깼는데, 목구멍에 들어가 있는 관을 느끼고 놀라 뽑아버렸다. 당연히 호흡곤란이 다시 시작됐다. 그런데 한 번 놀란 환자의 재삽관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나는 이 때문에 한 시간을 넘게 썼다.


 사건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나는 여러 번의 심폐소생술 때문인지 오후 늦게부터 요통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 밤이 되자 다리까지 저려 왔다. 지병인 허리디스크가 악화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병동에 굴러다니는 진통제를 아무렇게나 입 안에 털어넣고 밤 늦게까지 환자를 봤다. 요통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러다가 신기한 기분을 느꼈다. 몸은 점점 지쳐가는 한편 기분은 좋아지는 이상한 경험이었다.


 아마도 새벽녘, 안 좋았던 환자들 상태가 모두 안정화 되어서였을 것이다. 그래, 의사라면 원래 다 그런 거다. 내 환자 좋아지면 힘들어도기분 좋아지는 단순한 인간이 바로 의사다. 아침에 내가 한 말, 완전히 틀리진 않았다. “별 일 없을 것 같은 기분." 조금 다른 의미지만, 환자에게 별 일 없었다면 그걸로 된 것이었다.


 교대를 마치고 집에 가던 간호사 하나가 한 말이 기억났다. 그녀는 환타의 실언을 기억하고, 따뜻한 작별 인사를 남겨 주고 떠났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 환타 선생님이 다 살려 준다고 했어. 화이팅!"


 참으로 고마운 말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이탈 잡는 의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