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 「회색 눈사람」과 김연수 「뿌넝숴」 비평
「회색 눈사람」에서는 현실을 활자로 표현해 내는 데 사활을 건다. 반면 「뿌넝숴」에서는 ‘전사’ 따위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실제 겪은 전쟁의 처참함을 전달한다. ‘기록하고 전달해야만 하는 것’과 ‘도무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 대비된 수식어처럼 보이지만, 그 대상은 모두 ‘민주화운동’과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하고 파괴적인 현실이다.
이 두 작품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역사의 격랑이 한 개인의 삶 속에 어떤 형태로 스며들어 왔는지를”1) 보여 준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회색 눈사람」의 저자 최윤은 말한다. “주도적인 영웅이 아닌 주변인에 의해 이뤄진 역사, 역사의 대부분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1970, 80년대 운동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었던 90년대에 그런 물음들을 던지고 싶었다.”2) 「뿌넝숴」의 저자 김연수는 말한다. “1인칭. 나. 내 눈으로 바라본 세계. ‘나’로만 구성된 소설집을 한권 쓰고 싶었다.”3) 그는 편리하고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왜곡되는 역사적 기록을 비판하면서도, 결국 전쟁을 직접 겪은 개인의 역사 이야기를 소설에 담아냈다.
「회색 눈사람」에서 강하연은 “어느 사람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4) 쓸쓸하게 서울의 구석구석을 걷는다. 그는 어떤 투철한 의지를 가지고 안의 인쇄소에 발붙였던 것은 아니었다. 안과 그 무리에 속하고 싶었으나 그들은 신상이나 속사정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하연은 “그들에서 잊혀진 지가 너무 오래”5)되었고, 그의 이름이 남겨진 방식은 고작 김희진에게 빌려 주었던 도용된 이름으로서 짧은 기사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끝끝내 “어디에고 속하지 못한 사람”6)이었고, 유명한 운동가도, 소시민도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출판물의 교정을 보며 그 일부를 쓰기도 하고 또 김희진에게 자신의 신분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그가 (완전하거나 강력하지는 않을지라도) 열정을 가지고 투쟁에 참여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뿌넝숴」의 저자 김연수는 “이 책에서 ‘나’는 너무 많은 거짓말을 늘어놓았다.”7)라고 말한다. 물론 「뿌넝숴」의 화자는 전쟁 경험을 편리하고 이로운 대로 왜곡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지만, 모든 이야기에는 개인의 관점과 이익이 관여할 수밖에 없다. 김연수는 최대한으로 역사를 진실하게 전달할 방법을 ‘개인적 경험에 근거한 서술’에서 찾았으나, 이마저도 완전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 아닐까. “그 광경을 보고 나서야 새삼스럽게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더군. 전쟁이란 그런 것이더군. 어제 나는 죽을 수도 있었지. 하지만 오늘은 살아 있지.”8) 그럼에도, 앞의 대사에서 알 수 있듯, 김연수는 직접 겪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고통을 독자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두 소설에서, 담대하고 적극적인 ‘영웅’은 주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주변인에 대한 서술만 존재할 뿐이다. 이들은 확고한 가치관이나 신념을 가지고 투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앞선 최윤의 이야기처럼, 이들이 있었기에 역사가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었다. 또, 이러한 서술 방식으로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그려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이든, 그것이 역사 서술의 객관성을 완전하게 담보할 수 있겠는가? 사적이고 개별적인 이야기들이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모여 한 시대를 형성했고, 우리는 이들의 시선을 통해 시대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1) 김기석, 「그리움, 그리고 응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 - 최윤의 「회색 눈사람」」. 『새가정』 134-137, 새가정사, 1993.
2) “[문학기행] 최윤의 단편, 회색 눈사람”, 한국일보, 2001.02.27.,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0102280022523710 (2022.3.14.)
3) 김연수, 「뿌넝숴」,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266, 창비, 2005.
4) 최윤, 「회색 눈사람」 499, 문학과사회, 1992.
5) 최윤, 위의 책, 491.
6) 최윤, 위의 책, 508.
7) 김연수, 앞의 책, 266.
8) 김연수, 앞의 책,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