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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상 Nov 25. 2021

[문학] 작은 것들의 거대함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감상

시인 김수영. 연세대학교 홈페이지

- 전문


                             巨大한 뿌리

                                                                 김수영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면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감상


<거대한 뿌리>는 다양한 층위의 개별적인 사람들이 모여 거대한 뿌리로서 문화를 만들어 간다고 본다. 특히 그중 ‘애 못 낳는 여자’, ‘애꾸’와 같은 사회적 약자 계층에 주목한다.


시는 시작부터 ‘관습’에 대해 말한다. 이북식으로 앉은 친구, 이북 사람이지만 일본식으로 앉은 김병욱, 남쪽식으로 앉은 화자는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다. 또,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는 한국의 관습을 보고 ‘기이하다’고 말한다. 그녀의 나라에서는 보지 못했던, ‘다른’ 방식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특히 여성의 문화에 주목한다.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린 후 거리를 활보하고 심야에 다시 사라지는 여자들,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던 민비.


비숍여사의 생각을 통해 화자는 ‘진보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거대한 이념으로만 사회가 작동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오히려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들, 그중에서도 잘 보이지 않고 역사적으로 배제되는 약자들이 형성하는 ‘무수한 반동’이 모여 거대한 뿌리가 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이들 각자의 문화가 모여, 사회를 이루는 거대한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쨍쨍 울리는 추억’이며, 인간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에 화자가 긍정하는 대상이다. 또한 물질적인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우리의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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