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그가 회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회, 초밥을 엄청 좋아하는 난 반색했지만 알고 보니 그는 회보단 고기파였다.
모둠회에 청하를 시켰다. 즐겁지만 왠지 반복되는 대화 주제, 조금은 겉도는 느낌이다. 하나 둘 옆자리 손님도 가고 이제 우리도 일어날 때가 되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왠지 또 이대로 그냥 헤어질 것만 같았다. 아니, 더 이상은 안돼. 전부터 묻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을 더 이상 미룰 순 없다.
나는 툭 내뱉었다. "그런데 우리 무슨 사이예요?"
누군가를 좋아하면 기대를 하게 된다. 하지만 잊지 말자.
그 기대가 나를 망친다는 사실을.
나는 서툰 게 많다. 남녀 관계라고 별 수 있나. 초등학생 때 좋아했던 박 모군,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김 모군, 대학생 때 그리고 사회에 나와 만났던 남자들. 그중 오래 만났던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의 연애는 시작점은 있지만 끝은 흐릿했다. 공식적인 관계는 끝났지만 허공으로 쓱 흩어져버린 느낌. 헤어짐이 성숙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흘려보내지 않으리.
내가 누군가와 함께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부류의 사람이란 걸 인지한 지금, 나는 꼭 연애를 해야 하니까. 그래서 그동안의 만남을 복기하고 있다.
출퇴근 지하철 안이나, 산책하면서 그리고 이렇게 무작정 쓰면서. 또는 밥 먹다가 문득, 그때 나 왜 그랬지? 하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규칙이 있다. "그때 내가 ~이렇게 행동하고 말한 게 그 사람 마음에 안 들었나 봐"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말 것. 여기 들어가면 끝도 없이 바닥으로 파고 들어가 버리기 때문인데, 특히 자신감 수치가 미미한 나는 "내 탓"에 들어가면 못 빠져나온다.
대신 "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했지? 그때 상대방을 어떻게 배려했지?"에 방점을 두기로 했다. 그래도 후회스러운 순간은 많지만..
한 개인으로서의 나는 상식도, 품위도 적당히 있는 것 같은데 누군갈 좋아할 때의 나는 얼간이 같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엎어질 때마다 울분을 쏟으며 생각한다. 대체 세련되게 호감을 표현하고, 고상한 연애를 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건가 하고. 운명적인 타이밍,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서사는 로맨스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이다.
현실의 연애는 그 사람이 언제 만나자고 할까 싶어 평소엔 신경도 안 쓰는 수정 화장을 위해 파우더 팩트를 챙기고, 발 뒤꿈치 각질을 체크하고, 옷을 매일 바꿔 입고, 술은 그 남자와 마셔야 하니 평소엔 먹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현실은 그렇다.
왜? 그 사람이 좋으니까. 기왕이면 색다르게 보이고 싶고, 예뻐 보이고 싶고, 같이 어울리고 싶어서.
원체 경계심이 강해서 좀처럼 마음이 열리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만나기 전 카톡으로 얘기할 때도 즐거웠는데, 만났을 때 그 톤이 이어졌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지극히 사회적 마스크로 경직됐었는데, 이번엔 마음이 스르륵 풀리는 게 느껴져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내가 변한 건지 그 사람이 좋은 건지 궁금한 나머지 연거푸 만나자고 제안했다. 지금 생각하니 아마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만나자고 하면 흔쾌히 응해줘 고마운 일이었다.
같이 밥 먹고 술을 마시고, 얘기하는 게 좋았다.
사람이 붐비는 밤길을 걸을 때 간간히 조심하라고 잡아주는 짧은 손길도 좋았다.
별거 아닌, 그저 매너일 수 있지만 내게는 누군가 날 지켜주는 느낌,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 같은 든든함으로 다가왔다. 전전긍긍하며 혼자 해내는 것 말고, 상의하고 의지하고 기대 쉴 수 있는 누군가에 목말랐던 나에게는 그 손길과 목소리가 아주 강력한 인력으로 작용한 거다.
그 사람은 내가 편하지만 마음이 더 커지진 않는다고 했다. 괜찮다고 말해줬지만 사실 괜찮지 않았다. 서운했다. 난 너인데, 왜 넌 내가 아닌 건지..
그런데 거절에 움츠러들었다가,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니 이제야 그 사람의 노력이 눈에 들어온다.
나야 마음이 있으니 연락하고, 만나고 싶었지만 그는 나만큼이 아니었는데도 나와 시간을 보내고, 그간 살아온 얘기를 하고, 밥을 샀다.
그 나름대로 내게 집중하고 노력해준 거다.
고마워졌다. 같은 마음으로 화답받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준 그에게 고맙다.
그 사람 덕분에 진로소주가 부드럽다는 걸 알게 되었고, 선우정아 콘서트에서 '도망가자'도 라이브로 들었다. 무엇보다 마음이 열린다는 게 뭔지, 내가 누굴 좋아하면 어떤 얼굴을 하고 어떻게 변하는지 새삼 알게 됐다.
누군갈 좋아하면 기대하게 된다. 혼자 서운하다 설레었다 마음이 널뛴다. 분명 얼간이처럼 행동하다가 결국 망치게 될 거다. 하지만 기대하는 동안 행복해진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한 사람이 생겨서, 나에 대해 얘기해주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좋았다.
그가 하는 일이 승승장구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정말 고마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