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핏 잠이 깨어 시간을 보니 아침 아홉 시가 되어간다.
어제 오랜만에 술을 마셔 머리가 조금 아프지만 들이킨 소주 양 치고는 나쁘지 않다.
공복에 물 한잔과 유산균을 먹고 커피물을 끓인다.
오늘 아침은 스콘, 올리브, 계란 프라이 그리고 살구 5개. 살구는 어떤 분이 주셨는데 너무 달지 않고 산뜻해서 맛있다. 살구를 이제야 알게 되다니..
한 입씩 먹으며 책을 폈다. 요즘은 마스다 미리 시리즈를 본다. 지금 보는 건 에세이 "이제 아픈 구두는 신지 않는다".
제목만으로 30대 중반 미혼 여자의 마음을 관통하다니. 역시 저력이 있는 언니다.
어젠 그 사람과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등갈비에 소주를 먹었는데 어쩌다 등갈비를 먹게 됐더라..
평소라면 맥주 한잔이지만 소주를 좋아하는 그와 함께 어울리고 싶어서 나도 잔을 부딪혔다. 주거니 받거니, 깔깔대며 점점 취기가 오르는 밤.
그는 목소리가 좋다. 단단한데 부드러워서 계속 얘기하고 싶다. 그도 나처럼 즐거웠을까. 그럼 좋겠지만 아니라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일 거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바라다가, 문득 나는 좋은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글쎄.. 좋은 사람이라고 단언하기엔 좀 찔리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약점도 많다. 지금은 교정 이후 너무 약해진 잇몸이 지금 가장 큰 스트레스. 그리고 곱슬머리라 일 년에 2번은 볼륨 매직해야 하고.(볼륨매직이 15만 원이나 한다)
좋은 점도 생각해볼까. 음.. 분명 있는데. 음.. 이건 나중에.
머리 아프니 산책을 나가자.
원래 걷는 걸 좋아했지만 요즘 들어 산책이 더 좋아졌다. 때때로 산다는 건 너무 지난하고 복잡해서 나는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살면서 즐겁고 웃을 일도 있지만 불안하거나 고통스럽거나 혹은 신체적, 정신적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이 왔을 때 그것이 영영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죽음으로서 끝날 수 있다는 걸 떠올리면 조금 안도감이 든다. 너무 회피적인걸까.
산책은 고요를 찾는 나만의 방법.
한 걸음씩 걸으며 온종일 요란했던 머리와 마음을 가라앉힌다. 풍경, 바람, 사람들을 지나치며 내가 된다. 의지대로 행할 수 있는 자유에 감사한다.
서른 중반쯤 되면 나의 한계도, 괜찮은 점도 조금씩 알게 된다. 어떤 모양새의 삶이든 간에 살아가는 주체도, 판단하는 이도 나여야 평온하게 잘살고 있다는 마음이 든다. 그런 순간이 드물다는게 함정이지만.
갑작스러운 불안감으로 잠이 안 오는 밤엔 "언젠가는 죽을 거야. 그땐 이런 걱정도 노심초사도 그만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너무 겁내지 말고 조금만 더 힘내서 견디자. 응?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자"라고 위안한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버티고 겪어낸 시간들이 있다.
나만 아는 내 삶의 순간들. 어긋나거나 되는대로 막 살 수도 있었을텐데 그래도 성실히 살아줘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러므로 오늘 저녁엔 아몬드 크루아상을 사러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