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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당한 박선생 Jul 16. 2022

모둠회에 청하

고마웠어요!

언젠가 그가 회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회, 초밥을 엄청 좋아하는 난 반색했지만 알고 보니 그는 회보단 고기파였다.


모둠회에 청하를 시켰다. 즐겁지만 왠지 반복되는 대화 주제, 조금은 겉도는 느낌이다. 하나 둘 옆자리 손님도 가고 이제 우리도 일어날 때가 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왠지 또 이대로 그냥 헤어질 것 같았다. 아니, 더 이상은 안돼. 전부터 묻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더 이상 미룰 순 없다.

나는 툭 내뱉었다. "그런데 우리 무슨 사이예요?"


누군가를 좋아하면 기대를 하게 된다. 하지만 잊지 말자.

그 기대가 나를 망친다는 사실을.


나는 서툰 게 많다. 남녀 관계라고 별 수 있나. 초등학생 때 좋아했던 박 모군,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김 모군, 대학생 때 그리고 사회에 나와 만났던 남자들. 그중 오래 만났던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의 연애는 시작점은 있지만 끝은 흐릿했다. 공식적인 관계는 끝났지만 허공으로 쓱 흩어져버린 느낌. 헤어짐이 성숙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그렇게 흘려보내지 않으리.

내가 누군가와 함께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부류의 사람이란 걸 인지한 지금, 나는 꼭 연애를 해야 하니까. 그래서 그동안의 만남을 복기고 있다.


출퇴근 지하철 안이나, 산책하면서 그리고 이렇게 무작정 쓰면서. 또는 밥 먹다가 문득, 그때 나 왜 그랬지? 하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규칙이 있다. "그때 내가 ~이렇게 행동하고 말한 게 그 사람 마음에 안 들었나 봐"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말 것. 여기 들어가면 끝도 없이 바닥으로 파고 들어가 버리기 때문인데, 특히 자신감 수치가 미미한 나는 "내 탓"에 들어가면 못 빠져나온다.


대신 "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했지? 그때 상대방을 어떻게 배려했지?"에 방점을 두기로 했다. 그래도 후회스러운 순간 많지만..


한 개인으로서의 나는 상식도, 품위도 적당히 있는 것 같은 누군갈 좋아할 때의 나는 얼간이 같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엎어질 때마다 울분을 쏟으며 생각한다. 대체 세련되게 호감을 표현하고, 고상한 연애를 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건가 하고. 운명적인 타이밍,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서사는 로맨스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이다.


현실의 연애는 그 사람이 언제 만나자고 할까 싶어 평소엔 신경도 안 쓰는 수정 화장을 위해 파우더 팩트를 챙기고, 발 뒤꿈치 각질을 체크하고, 옷을 매일 바꿔 입고, 술은 그 남자와 마셔야 하니 평소엔 먹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현실은 그다.

왜? 그 사람이 좋으니까. 기왕이면 색다르게 보이고 싶고, 예뻐 보이고 싶고, 같이 어울리고 싶어서.


원체 경계심이 강해서 좀처럼 마음이 열리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만나기 전 카톡으로 얘기할 때도 즐거웠는데, 만났을 때 그 톤이 이어졌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지극히 사회적 마스크로 경직됐었는데, 이번엔 마음이 스르륵 풀리는 게 느껴져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내가 변한 건지 그 사람이 좋은 건지 궁금한 나머지 연거푸 만나자고 제안했다. 지금 생각하니 아마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만나자고 하면 흔쾌히 응해줘 고마운 일이었다.


같이 밥 먹고 술을 마시고, 얘기하는 게 좋았다.

사람이 붐비는 밤길을 걸을 때 간간히 조심하라고 잡아주는 짧은 손길도 좋았다.


별거 아닌, 그저 매너일 수 있지만 내게는 누군가 날 지켜주는 느낌,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 같은 든든함으로 다가왔다. 전전긍긍하 혼자 해내는 것 말고, 상의하고 의지하고 기대 쉴 수 있는 누군가에 목말랐던 나에게는 그 손길과 목소리가 아주 강력한 인력으로 작용한 거다.


그 사람은 내가 편하지만 마음이 더 커지진 않는다고 했다. 괜찮다고 말해줬지만 사실 괜찮지 않았다. 서운했다. 난 너인데, 왜 넌 내가 아닌 건지..


그런데 거절에 움츠러들었다가,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니 이제야 그 사람의 노력이 눈에 들어온다.


나야 마음이 있으니 연락하고, 만나고 싶었지만 그는 나만큼 아니었는데 나와 시간을 보내고, 그간 살아온 얘기하고,  샀다.


나름대로 내게 집중하고 노력해준 거다. 

고마워졌다. 같은 마음으로 화답받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준 그에게 고맙다.

그 사람 덕분에 진로소주가 부드럽다는 걸 알게 되었고, 선우정아 콘서트에서 '도망가자'도 라이브로 들었다. 무엇보다 마음이 열린다는 게 뭔지, 내가 누굴 좋아하면 어떤 얼굴을 하고 어떻게 변하는지 새삼 알게 됐다.


누군갈 좋아하면 기대하게 된다. 혼자 서운하다 설레었다 마음이 널뛴다. 분명 얼간이처럼 행동하다가 결국 망치게 될 거다. 하지만 기대하는 동안 행복해진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한 사람이 생겨서, 나에 대해 얘기해주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좋았다.


그가 하는 일이 승승장구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정말 고마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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