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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조 Jan 28. 2024

OO에게

수많은 "어떻게"를 함께 고민해 봐요.



어떻게 수목한계선이 애초에 우리 세계를 거주 가능한 곳으로 만들었는지, 어떻게 숲이 비를 만들고 바람을 일으키고 물을 다스리고 바다의 씨앗이 되고 현대 의학의 토대를 제공하고 인간에 의해 오염된 공기를 정화하고 대기를 살균하는지를 더 널리 가르치고 이해시킨다면 나무를 베기가 훨씬 힘들어질 것이다. (...) 다른 생명체와의 필수적 얽힘을 복원해야 한다.


무시무시한 금기는 인간이 자연의 과정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지구 핵심종의 어깨에 놓인 두려운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온난화는 기정사실이지만, 종이 온난화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며, 인류는 그 이야기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우리는 자녀들이 불확실성에 대비하도록 해야 하지만, 피해자로 살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청지기이며 여전히 옛 책임을 맡고 있다. 지구는 살아 있고 마법에 걸려 있다. 그 속에서 행동한다는 것은 살아 감으로써 마법을 거는 것,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다. 작건 크건 당신의 모든 움직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달아 걸음마다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벤 롤런스, [지구의 마지막 숲을 걷다] 중






OO이 보내주신 글을 꼼꼼히 밑줄 그으며 읽었어요. 기후 문제와 삶의 연결에 대한 부분은 몇 번이고 더 읽었습니다.


저 역시 정밀하게 짜인 자본주의 시나리오 안에 살면서, 상품화된 세상을 소비만 하고 살고 있는 개인입니다. [지구의 마지막 숲을 걷다]와 같은 좋은 책을 읽으면 저에 대한 환멸이 느껴집니다. 스스로 ‘더 부유하고 더 편안하게 살려는 욕구가 정말 내 안에 없나?’라는 질문을 하면 부끄러워질 뿐이구요.


OO이 텔에서 저에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해주셨는데, 저는 그 말이 무척 부끄럽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만 있을 뿐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자동차를 자주 이용하고, 쓰레기를 만드는데 죄책감이 적고, 공장식 축산업으로 길러진 고기를 먹고 삽니다. 행동이 말보다 심하게 더딘 사람입니다. 그림으로 그리자면 머리만 거대하고 팔다리는 퇴화되기 직전인, 그런 모습이 아닐까요.  [걸리버 여행기](현대지성)에 등장하는 왜곡된 신체의 등장인물들처럼 말이죠.



이야기의 마지막 장에서 걸리버는 후이늠국을 여행합니다. 말이 주인(후이늠)이고 인간이 짐승(야후)인 세상에서 걸리버는 인간 세상의 부조리를 이야기합니다.


“야후가 이 귀중한 물질(화폐)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원하는 건 무엇이든 살 수 있습니다. 훌륭한 옷, 웅장한 집, 광대한 땅, 가장 비싼 고기와 술은 물론 가장 아름다운 암컷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돈으로 이 모든 재주를 부릴 수 있기에 우리 야후는 늘 사용하거나 저축할 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치나 탐욕이라는 본질적인 성향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가 일한 노동의 결실을 누리는데, 가난한 자가 1천 명이면 부자는 한 명입니다. 우리 대다수는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 푼돈을 받으며 소수가 풍족하게 사는 것을 도와주는 그런 삶을 사는 거죠.”(308)


걸리버가 직접 이야기하는 자본주의 아래 처참한 인간군상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짐승화된 인간인 야후는 처참할 정도로 야비하며 교활하고 길들이기 어려운 짐승으로 등장합니다. 1726년에 쓰여진 이 책이 2024년의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며, (더 심하게는 더욱 정교하고 악의적인 오늘날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며) 또다시 패배감과 무력감이 듭니다. 제가 이 신랄한 글 속의 야후이며 인간임을 자명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너선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인류애에 기반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풍자적으로 세상의 병폐를 그리고 있지만, 이성을 바탕으로 한 인간성의 회복을 희망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가 이상향으로 제시한 후이늠의 미덕은 우정과 박애(328)입니다. 그는 “이런 미덕은 특정 대상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종족 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 그들은 자식을 맹목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며, (...) 나는 주인이 이웃의 자식을 자기 자 식과 다를 바 없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라고 씁니다.


우정과 박애, 그것이야 말로 오늘날 물질주의와 개인화,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대안으로 선언되고 있는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최근에 포스트중등의 졸업식의 제목이었던 “더 사랑스럽고 더 혁명적이게”가 생각났습니다. 사랑과 혁명이 병렬적으로 놓인 이 긴 부사에서, 갑자기 마음의 눈이 떠진 것 같은 맑은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작건 크건 당신의 모든 움직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달아 걸음마다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는 OO이 주신 글 마지막 문장에서는 별 수 없이, 제 안의 낙관론자가 깨어났습니다. 미래를 만들어 가는 키를 제가 잡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웅장해지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많이 모자란 사람을 희망적으로 해석해보자면, 앞으로 채워나갈 사람이겠죠. OO이 보내준 글, 좋은 책, 좋은 사람, 성미산 학교, 마을, 공동육아, 공동체, 연대감 등을 통해 어쩌면 “무엇을 채워야 할지 알게 된 사람” 만큼은 자란 것이 아닌지. 스스로를, 그리고 우리를 함부로 낙관해 봅니다.


사족이 되겠지만 같은 책에서 조너선 스위프트는 “절제, 근면, 운동, 청결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실천해야 하는 가르침”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330) 이 굵직하고 큰 단어들이 가리키는 것은 곧 “실천” 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좋은 말속에 숨어 있는 [어떻게]들. 꼬깃꼬깃 마음속에 품습니다. 자만하는 마음일 공산이 크겠으나, 채울 게 많은 사람으로서 행동 리스트를 만들고 실천하는 일, 그것의 큐사인을 던져주신 것 같아 OO의 글이 더욱 고맙습니다.


감사한 계기들로, 저도 마치 학교의 (나이 든) 학생이 된 듯, 얻어가는 것이 무척 많습니다. 더 기회가 된다면, 수많은 “어떻게”들을 만드는 일도 함께 고민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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