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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May 29. 2024

빨래 개기와 홈홈


  빛이 흐드러진 오후, 옅게 우린 녹차를 마신다. 장미 조금, 망고와 파파야 조각 조금이 섞인 녹차의 이름은 초록 장미 Green Rose. 연둣빛 장미를 상상해 봐. 갓 말린 이불에 푸른 꽃과 풀을 뜯어 함께 누운 것 같아. 한껏 볕을 머금은 이불을 거실에 펼쳐 고양이와 드러누워도 좋겠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잘도 가도 시간은 원래 그런 것이니 잘 가렴, 그대로 내버려 두고.

  냉침을 할 걸 그랬나. 미지근한 차도 좋지만 차가운 물에 하루 우린 차는 시원해서 좋아. 날이 좀 더 뜨거워지면 그래야겠다. 해야 할 목록의 일은 줄어들 생각이 없고.

    

  며칠 내 비가 왔다. 흐린 날에는 냄새처럼 몸도 마음도 쉽게 고인다. 물에 담긴 빨래처럼 퉁퉁 불어서, 나의 때와 못난 부분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 그대로 보여서 자꾸만 구석으로 숨고 싶어만 진다. 날이 좋아지면 그때 일어날게. 치밀어 오르는 게으름과 노곤함이 모든 것을 이겨 보이고 보이지 않는 일들을 다시 한쪽으로 밀어두지. 그렇게 해야 할 일의 목록은 자꾸만 늘어나고.


들이쉬고

내쉬고

숨을 쉬는 것처럼 특별한 것도 급한 것도 없이

그러나 고르게 이어지도록.

     

  어느 정도 체력이 돌아왔으니 할 것들의 목록을 적어보기로 한다. 지키고 싶은 하루의 순서를 정하고 나름의 규칙을 세운다. 아침에 일어나면 햇빛보기, 세 시간 글쓰기, 책상 정돈하기, 커피 연하게 마시기처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매일 지키기 힘든 것들. 다 말려진 빨래를 미루지 않고 바로 개는 그런 사소한 것들.

       

  얼마 전 박물관에서 쌍희 희囍자를 보고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 집 양은밥상에 꽃무리에 묻혀 쓰여있던 글자. 저 글자는 뭐라고 읽을까. 어렸을 때는 홈홈인가 횸횸인가하고 읽었는데, 저 반쪽은 기쁠 희인데. 기쁠 희가 두 개 있으면 뭐가 될까. 할머니는 여름이면 그 상에 시원한 국수를 말아주었는데. 다음날인가 알아보니 쌍희 희라고 했다. 기쁘고 기쁘니 함께 기뻐라. 참 사랑스러운 글자라 생각하며 박물관 베갯잇과 수납장에 수놓아진 홈홈들을 떠올렸다. 기뻐라, 기뻐라, 단 잠을 자고 일을 하고 차를 마시고 책상이나 버스 의자에 앉아있는 우리는 서로 기뻐라.


  어질러진 책상에 앉아 녹차를 홀짝인다. 찻잎과 장미잎, 망고 조각과 파파야 조각이 스며든 찻물을 마시면서 오늘은 해가 좋구나, 빨래가 잘도 마르겠구나 기뻐한다. 시간은 가고 어차피 갈 시간 고이 보내주고. 겹쳐지고 겹쳐지는 것들을 하나씩 차곡차곡 꺼내 말린다. 기뻐할 일들의 목록을 새로이 발견한다.

  책상 정리는 내일 해야지, 약간의 게으름을 껴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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