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뭔지 더 모르게 되었다
9를 보내며
10월 13일은 병구의 생일이었다. 나는 병구에게 병원에서 맞는 생일이 어떠하냐고 일부러 경쾌하게 물었다. 병구는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고 생일선물로 2개월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답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당황스러움을 감추려고 너무 웃긴 선물이라고 답하면서, 12월 5일이 내 생일이니까 그때까지 멀쩡히 살아 있으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날은 2개월에 채 못 미치는 날짜이고 혹시라도 병구가 그때까지만 살아 있을까 봐 전하지 않았다.
11월 29일 수요일, 성실하고 부지런했던 병구는 겨우 39살에 생을 다하고 말았다. 나는 내가 하려다 거둔 말을 병구에게 한 줄로 지금까지 착각하고 있었다. 내 생일까지는 살아 있으라고 했는데, 바로 며칠 뒤면 내 생일인데, 이렇게 황망하게 떠나버린 병구가 야속했다. 슬펐다. 영정사진을 눈앞에 두고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둘째 날, 병구 어머니의 통곡소리에 잠에서 깼다. 입관하기 전 수의를 입고 가지런히 누워 있는 병구를 보고서도 현실감이 없었다. 눈앞에 있는데. 만질 수가 있잖아. 조문객들이 빈소에 드나드는 동안 병구는 같은 장소에 모두와 함께 있었다. 그런데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병구와 나눈 메시지를 쭉 훑어보았다. ‘세계최초완치’로 스스로를 증명하겠다고 당당히 얘기했던 게 한여름이었다. 가을이 되면 단풍놀이 가자고. 전주에 또 놀러 가자고, 그때 참 재밌었다고. 그런 말들이 모두에게 희망이 되고 힘이 되었는데. 병구가 약해질 때마다 무기처럼 꺼내드는 강한 말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병구의 말투는 아픈 몸만큼이나 생기를 잃었다. 나는 병구의 아픔과는 상관없는, 더 쓸데없는 말들만 늘어놓았다. 그리고 병구와 나눈 메시지엔 내가 거둔 말이 당연히 없었다. 그 말을 했다면 어땠을까. 여전히 살아 있을까. 왠지 살아 있을 것 같다. 모르겠다.
병구를 영구차에 실어 보내고 빈소가 비워지는 걸 지켜보았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흔들리는 디지털 꽃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병구 사진도 사라졌다.
죽음이 뭔지 더 모르게 되었다. 다만 집으로 돌아가며 운전을 하는 영감의 옆얼굴을 보다 갑자기 실감이 났다. 바라볼 수 있는 얼굴이 뼈저리게 소중하고 귀하다는 걸.
차 안에 흐르는 노래를 듣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마음 깊이 박혔다. 더 볼 수 없다는 것, 독특한 병구 말투를 따라 할 수 없다는 것, 같이 놀 수 없다는 것, 병구가 키운 달디단 꿀을 먹을 수 없다는 것, 병구와 내가 오랜 시간 적당한 거리감을 둔 친구에서 더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는 것, 이 모든 게 마지막이라는 게 생경하고 허전하다.
잊을 리 없지만 더 기억하려고, 언제든 꺼내보려고 이 글을 썼어. 병구야 안녕.
1984.10.13-2023.11.29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