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을 시작하게 된 이유
언젠가 방송국에서 일하던 친구가 촬영 중 박태환 선수가 수영하는 모습을 옆에서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박태환 선수가 물에 뛰어드는 순간부터 돌고래처럼 물을 가르며 수영을 하는 모습은 약간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유연하면서도 힘이 있었다고 말했다. 중력의 힘이 작용하는 세계와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모습.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수영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기만 했는데도 친구가 너무 실감 나게 이야기했기 때문인지, 바로 옆에서 박태환 선수가 물에 뛰어드는 모습, 정확히 말하면 등근육이 보이는 듯했다.
<카모메 식당>이라는 일본 영화를 좋아한다. 그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중간중간 수영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개구리처럼 천천히 왔다 갔다 하며 수영을 하는데 그게 그렇게 평화로워 보일 수가 없다. 마음이 불안할 때 나는 <카모메 식당> 영화를 틀고 주인공이 수영하는 부분만 찾아서 본다. 물론 배경 음악으로 흐르는 <카네이션>이라는 노래도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요인이 되는 것 같지만 주인공이 물을 천천히 가르며 힘들지 않게 물에 떠 있는 모습은 마음에 위안이 된다. 이런 아름다운 수영인들의 모습이 부러워서 나는 수영을 시작하게 되었다.
라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분명히 이렇게 환상적인 수영인들의 모습도 '수영을 배워볼까?'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생각으로만 끝났다. 박태환 선수의 이야기를 들은 것도 오래전이고 카모메식당을 처음 본 것은 그보다 더 오래전이다. 그리고 세상엔 환상적인 모습의 운동이 정말 많다. 운동뿐만 아니라 그림 그리는 것도 요리를 잘 만드는 것도 멋지다. 세상에 멋진 것을 모두 다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수영을 배워볼까 생각하는 이유는 더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바로 '생존'이다.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라 '원하지 않는 상황에 갑자기 물에 빠지게 되어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되면 어쩌지?'라는 불안이 나를 수영이라는 세계의 문 앞으로 이끈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원인이었다. 나는 물을 정말 무서워한다. 물속에 머리가 잠기는 것은 상상만 해도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간혹 세수를 하다가도 내 앞으로 다가오는 손바닥에 담긴 물이 무서울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계곡, 강, 바다에서 사고를 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러므로 내가 만약 수영을 배운다면 그것은 물속에서 헤엄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물에서 헤엄을 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부차적인 것이다. 나는 수영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물에 조금이라도 익숙해지고 싶어서 수영강습을 가는 것이다. 아무래도 수영을 배우다 보면 나의 몸이 깊은 물에 자주 담가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물의 느낌도 몸에 적응이 되지 않을까? 내가 지금처럼 물을 무서워하는 상태로 물에서 사고를 당한다면 막연한 공포감으로 물에 빠졌다는 사실 자체에 질려서 구조될 수 있음에도 살기를 포기하고 마는 상황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이토록 무섭지만 수영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과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사실 별개의 문제다.
물을 무서워하는 나는 자연스럽게 물과는 멀리 떨어져 지냈다. 피서지를 바닷가로 정하지 않고, 혹시 가더라도 발에 물만 담그기. 계곡에 가면 내 무릎 조금 위까지 오는 낮은 물에만 들어가서 앉아있기. 그래도 시원하니까. 이렇게 지내도 살아가는데 힘든 일은 없었다. 물가를 안 가면 되고, 가더라도 조금 창피하면 되었다. 외국 리조트 풀장에서 놀 때 '수영을 못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외국인들의 눈빛 견디기' 이런 것들은 잠깐이면 지나갔다. 이렇게 피해 다니니 내가 사고로 물에 빠지는 일도 생기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수영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살면서 간혹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니 상황이 달라졌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아이들은 물에서 노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수영도 못하면서. 나는 엄마이기 때문에 같이 물에 들어가야 했고, 아이들이 위험해지는 상황에서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나 혼자도 물에서는 무서운데, 아이들까지 지켜야 하니 갑자기 부담이 두 배가 되었다. 또 초등학교 1학년인 딸은 나에게 "엄마는 물에도 안 뜨지?"라면서 은근히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데 그 말을 다른 사람이 했으면 '뭐라는 거냐'라고 넘겨버렸겠지만 딸이 이렇게 말하니 '정말 나는 왜 물에 안 뜨지? 다른 사람들은 물에 뜨기도 하고 심지어 수영도 하는데 나는 죽을 때까지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으려나?'라는 생각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딸의 힘이 이렇게 무섭다) 수영은 부모로서의 지위와 아이들의 안전에 대한 책임에 관한 문제로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이번엔 뒤로 미룰 수 없었다. 수영을 배워볼까?
생각만 해도 겁이 나지만 수영을 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물놀이 갈 때 튜브를 안 챙겨도 되는 몸이 되면 기분이 어떨까? 머릿속에 막연한 물음표가 아닌 곧 닥친 생생한 느낌의 물음표가 그려졌다. 그리고 대범하게도 연초의 목표를 '물에 뜨기', '튜브 없이 어떤 식으로든 물에서 앞으로 가기'로 잡았다. 막상 수영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나니 스스로 대견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수영을 배운다는 것은 40년 넘게 묻어둔 온몸의 능력을 깨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런 능력이 나에게 있긴 있겠지?) 수영을 할 줄 알게 되면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를 할 때도 안심하고 함께 즐길 수 있게 될 것이고, 물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 것이다. 나아가 물에서 자유로워지면 또 다른 느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이제는 수영을 배워보자. 결국 나를 수영으로 이끈 것은 멋진 박태환도 물 공포증도 아닌 내 딸의 한 마디 '엄마는 물에도 안 뜨지?'라는 말 때문, 아니 덕분이었다. 그리고 '딸아, 엄마는 물에 안 뜨는 것이 아니라 못 뜨는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