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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지현 Aug 21. 2023

출근길의 주문

4화. 서른, 은퇴를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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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군인이다, 나는 군인이다.'


출근길의 주문이다. 본관 자동문이 열리기 직전까지 속엣말을 중얼중얼 되뇐다. 스스로 최면을 거는 것이다. 회사에서 나의 타고난 기질은 방해가 될 뿐이었다. 등뒤로 문이 닫히면 일순간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눈빛은 매서워진다. 방심하면 '책임 전가'라는 수류탄과 '업무 떠넘기기' 폭탄이 날아올지 모른다. 청각도 예민해진다. 내선 전화가 '따르릉' 울리면 이미 늦다. '따'하면 자동반사로 팔을 뻗는다. 건너편 타 부서 전화까지 당겨 받는다. 상사의 부름에 우렁찬 "네!" 대답과 동시에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준비태세를 유지한다. 자료는 단 번에 찾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파일철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면 이내 불호령이 떨어진다. "아직 멀었나?" 식은땀이 흐르고 뇌정지가 온다. 급기야 아무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면 끝장. 5분 내 프린트기로 성큼성큼 다가간다. 보고드릴 내용을 생각하면서.


주어를 뚝 잘라먹고 불쑥 물으면 버퍼링이 걸린다. 출제자의 의도를 수수께끼 풀듯 요리조리 유추해 보느라 머릿속은 비상이다. 되물어 볼 수 있지 않냐고? 상사의 무시와 경멸이 섞인 눈빛을 매번 보고 싶다면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상사는 묻는 말에 어서 답하라고 온몸으로 재촉한다. 방금 전까지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건 그의 관심 밖일 뿐이다. 나는 몰입하면 옆에서 꽹과리를 쳐도 잘 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업무적으로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고 노래하는 각설이 보다 수심 50m까지 잠수해 전복을 따오는 해녀에 가깝다. 바닥에서 수면 위로 올라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그러나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잘'하기보다 '대충, 빨리' 끝내는 사람이 인정받는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의 몸값을 더 높게 쳐준다. 


점심시간도 긴장을 늦추면 굶어 죽을 수 있다. 옛말 틀린 것 없다지만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틀린 말이다. "대가리가 다 먹었으면 숟가락 놔야지." 나도 20년 차가 되면 거의 마신다고 할 정도로 속도가 빨라지려나? 흰쌀밥을 연료처럼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어보지만 역부족이다. 먼저 가셔서 소중한 점심시간 1분이라도 더 쉬시라 권해봐도 요지부동이다. 눈물겨운 의리다. 제일 좋아하는 고구마 맛탕도 그림의 떡이다. 식판에 아직 많이 남은 반찬을 아련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몸속에 채워진 열량보다 소모하는 에너지가 많아서인지 입사하고 5kg가 빠졌다. 강제 다이어트도 되고 좋지 뭐. 남녀가 식사를 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애초에 디폴트값이 다른가? 1년 뒤 여자 후배가 들어오고 나서는 둘이 남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몸담았던 환경 분야는 채용 정원이 보통 한 자리 수다. 티오가 거의 없는 직업군이라 두 회사 모두 수시 및 경력 채용으로 입사했다. 기존 담당자가 퇴사해야만 기회가 주어지거나, 법적으로 관리 대상 시설 수가 대폭 늘어나면 충원되는 식이었다. 첫 회사는 섬유를 만드는 직원 수 600명 규모의 중견기업이었는데 1명이 전공장 관리를 전담하는 구조였다. 수질, 대기, 폐기물, 화학물질, 토양을 아우르는 환경 업무를 일괄 도맡았다. 위탁 처리 및 대행업체 관리부터 오염물질 측정, 설비 유지보수, 근로자 교육, 정기검사 수검, 관공서 대관, 고객사 Audit 대응 등 얕지만 넓은 범위를 다뤘다. 그러다 체계적으로 한 분야만 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이가 없으니 어딘가 늘 불안했고, 성향상 멀티플레이어 보다 스페셜리스트가 어울릴 것 같았다. 이직한 대기업은 전보다 2배 큰 1,300명 규모였고, 내가 속한 화학물질 파트만 총 5명이나 되었다. 직급도 팀장, 과장, 대리, 주임, 사원으로 안정적인 구조였다.


모든 것이 딱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나는 공장 한복판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울먹이고 있었다. "대리님, 저 길 잃은 것 같아요. 어디라고 설명드려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때는 정기검사 시즌이었는데 뿔뿔이 흩어져 사전 현장 점검을 하다 졸지에 미아가 돼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없이 똑같은 색깔과 모양의 탱크와 창고, 배관, 개별 공장만이 즐비해 있었다. 공채와 달리 경력직은 현장 투어와 직무 교육이 없었다. 현상파악할 시간도 없이 오더가 떨어진다. 일단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기대가 깔려있다.


그렇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다. 눈치껏 혼자 배우기가 암묵적 관행처럼 되어왔다. 챙겨주고 싶어도 내 코가 석자인 실상이다. 기업들이 점점 신규채용을 줄이고 일해 본 사람을 뽑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힘든 만큼 빨리 성장하기도 했다. 머리 싸매고 얻은 배움은 문신처럼 평생 내 몸에 새겨졌다. 그러나 가르쳐 주지도 않고 뭐라고 할 때의 설움은 어쩔 수 없이 견디기 힘들다. 기대에 못 미칠까 늘 불안하고 노심초사하다. 양날의 검인 것이다. 호랑이는 세상 물정 모르는 제 새끼를 야생에 바로 내던진다. 경력직은 호랑이 새끼다.


살아남기까지 돈과 성장 욕구가 목발이 돼주었다. 대기업 사원에게 중견기업 과장과 맞먹는 월급이 주어졌다. 같은 노비라도 양반집 노비가 좋지 않은가. 주식으로 치면 수익률이 200% 증가한 효과이니 이만한 재테크도 없었다. 다음으로 대리님에게는 훔치고 싶은 업무 스킬이 있었다. 솔직히 원망스럽고 얄미워 남몰래 눈물 훔치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실력이 있었다. 50년간 미결된 프로젝트를 풀어내는데 일조하신 분이었다. 대리님의 스피치는 전사 협조를 끌어내는 힘이 있었다. 공과 사가 뚜렷한 처세도 대단했다. 회사에선 호랑이였지만 회식 자리에선 아빠 같았다. 팀원에게 공을 돌리며 강점을 추켜세우는 재주가 있으셔서 나는 가장 높은 고과와 수당을 받을 수 있었다.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은 없다. 돈을 많이 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고, 배우려면 감수해야 할 설움이 있다. 


그는 더 좋은 기업으로 옮겨갔지만 분명 내게 물려준 무언가가 있었다. 나에게서 그의 모습이 종종 보였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만약 대리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왔다. 이따금 초록색 소주병이 든 검은 봉지를 한 손에 들고 털레털레 집으로 향하던 그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커서 무거운 짐을 덜어드렸다면 우린 조금 더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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