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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지현 Aug 30. 2023

119 구급대원님 존경합니다.

8화. 서른, 은퇴를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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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로운 일요일 아침. 따스한 바람이 살랑이는 봄날이다. 온 가족이 들뜬 표정으로 현관을 나선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뿔뿔이 흩어진 식구들이 모처럼 뭉쳤다. 아버지 생신 겸 외식하러 나가는 길이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순간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우웅- 우웅-.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 OO 화학재난합동방재센터 OO 연구사 님


주말 아침에 이곳에서 전화가 오는 이유는 1가지뿐이다. 화학사고. 왜 주말이나 한밤중에만 사고가 터지는지 모를 노릇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3초간 고민했다. 받을까 말까. 받으면 가족 모임은 없던 일처럼 증발 돼버린다. 아무도 없는 공장으로 출동해야 한다. 자는 척하거나 서울여행을 왔다고 둘러대는 방법도 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거짓말에 유독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탓이다. 체벌의 통증을 몸은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구사는 왜 팀장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은 것인지 살짝 억울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어차피 탑다운 방식으로 대응하는데 말이다.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 건너로 들려왔다.


"인근 공장에서 화학사고 의심 신고를 접수받았는데요. 굉음과 함께 불꽃이 일었다고요. 지금 당장 현황 파악하셔서 바로 연락 좀 주세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하지만 15분을 넘기면 지연 신고로 가중 처벌되기에 넋 놓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팀장님은 부재중. 믿을 만한 사람은 사수뿐이었다. 그는 산업단지 내 화학 공장에서 일하며 사고 대응 경험이 많았다. 사망사고와 검찰 조사도 몇 차례 겪어본 사람이었다. 사수는 팀장을 대신해 업무 지시를 내렸다. 현장까지 1시간 걸리니, 그동안 사고 발생 공정과 설비, 피해 정도 등을 알아보라 했다.


즉시 경비실과 해당 부서 관리자에게 전화하려는데 다시 연구사에게 전화가 왔다. "확인된 사실 있나요?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나요?" 짜증과 조급함이 뒤섞인 말투였다. 상부의 안전원과 유관 기관에 통보가 늦어지면 센터 측에도 책임이 생기기 때문이다. 협의한 대로 사수의 연락처를 넘겨주고 수 십 명에게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빗발치는 전화에 쫓기며 마음이 급속도로 타들어 갔다. 그러던 중 팀 카톡방에 사진이 올라왔다. 다행스럽게도 도면을 보니 신고를 해야 하는 시설이 아니었다. 단순 안전사고로 판명되었으며 소방서에서 이미 진화를 마쳤다는 소식이었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팀장님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혹시 이후로는 별일 없었을까요?" 혹시나 하는 걱정과 불안에 급히 여쭤보았다. 그리고 팀과 연관된 일이니 관심가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사수는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대화에 끼어들겠거니 했지만 잠시 후 나를 따로 불러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무슨 실수를 했나 열심히 곱씹어 보았지만 퍼뜩 떠오르는 문제는 없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잠자코 있다가 벼락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네가 팀장이야? 별일 없었냐고 물어야 할 사람은 팀장이다. 네가 보고받을 위치는 아닌 거 같은데? 듣다가 너무 놀라서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더라."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관심이 무례하게 비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팀장님도 기분 나쁜 기색이 전혀 없으셨기에 당혹스러웠다. 알고 보니 내가 출근하기 전 두 분이 본부장실에 불려 가 미진한 사고대응체계에 된통 꾸짖음을 듣고 한껏 곤두서있던 것이다.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현장에 달려왔는데 아침부터 욕만 한 바가지 먹으니 화가 날 법도 하다. 나는 내리 갈굼이라는 단어를 몰랐지만 그때 처음 경험해 본 것이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기도 전 며칠 뒤 한밤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 OO화학재난합동방재센터 OO 팀장


지긋지긋해하며 곧바로 받았다. "3공장 앞을 지나가던 트럭 기사가 약품 냄새로 숨도 못 쉴 지경이라는 민원이 들어왔어요. 화학사고인지 즉시 확인 후 연락해 주세요." 끊자마자 연달아 진동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 OO화학재난합동방재센터 OO 연구사


불면증에 시달리다 겨우 잠이 든 탓에 짜증이 밀려왔다. 천성이 느긋한 나는 조급함에 특히 예민한 사람이었다. 재촉하고 닦달하는 순간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예민해지고 공격적이어지며 한없이 비관적으로 바뀐다. 그래도 일인데 화낼 순 없는 노릇. 빠른 회신을 약속한 뒤 팀장에게 전화를 걸려던 차 또다시 폰이 왱왱거렸다.


- OO화학재난합동방재센터 OO 과장


이때부터였을까? 콜포비아가 발현된 것이. 전화만 오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쿵쾅쿵쾅 뛰었다. 불안 증세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났다. 사택 건너편 소방서에서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나면 사색이 되었다. '혹시 우리 공장으로 가는 건가?' 창 밖으로 목을 빼고 방향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진정한다.


팀원들은 점점 말수가 없어졌다. 사수는 작은 일도 그냥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그가 화학사고 대응 교육 시행문을 전자문서로 배포한 날이었다. 못 본 사람들도 있을 테니, 나에게 요약문을 메일로 다시 뿌리라고 지시했다. 정신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군말 없이 따랐다. 발송을 마치자마자 불호령이 떨어졌다.


"내가 쓴 글 제대로 안 읽지? 일정 빠트렸잖아. 지금 당장 전 부서에 전화 다 돌려!"


부서는 40개다. 똑같은 말을 3분만 해도 2시간이 걸린다. 업무 로스다. 요약문에 원문 링크를 첨부해 두었으니 사실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뒤편에서 부장님이 중얼거렸다. "다들 바빠서 자세히 메일 읽을 사람도 없을 테고, 이런 일로 전화하면 괜히 역효과 날 텐데..." 그래도 사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후배들은 바짝 긴장한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누군가 해준 군대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리 갈굼만큼 기강 잡는데 직방인 방법은 없다는 얘기. 내가 혼날까 봐 후배들은 눈치껏 움직였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의 목표가 '성장'이 아니고 '혼나지 않기 위해서'가 되었으니 말이다. 연이은 사고로 인해 우리는 극도로 예민해져 갔다. 팀이 와해되기 일보직전이었다.


주말은 모처럼 연인을 만나 아무 생각 없이 늘어져 쉬었다. 저녁에 맥주 한잔 하러 나가 넋두리를 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조용하냐. 사고 났다고 연락 안 오네." 말이 씨가 된 걸까? 단체 톡방에 1이 떴다.


- OO공정 21시 35분 황산으로 의심되는 물질 누출, 담당자 OOO과 연락 및 현장 확인 중


내 직업은 뭘까? 환경 엔지니어가 이런 직업이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24시간 대기조가 된 것만 같았다. 갑자기 119 구급대원님들이 존경스러워졌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친구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 평범한 일상도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 가족과 연인, 친구와의 안온한 시간들, 숙면을 보장받지 못해도 괜찮다 여길 수 있는 마음은 대체 무얼까? 앞으로 사고는 잦으면 잦았지 줄어들진 않을 것이다. 50년이 넘은 설비가 하나 둘 제 수명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사고 수습 일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와 결이 달랐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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