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먹한 부녀 사이를 새삼 되짚어보며
밥하는 것조차 귀찮아 배달음식으로 대신한, 어느 늘어지는 주말 오후에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잘 없는 일이다. 친정에서 나와 통화하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대체로 엄마다. 반찬이나 신변잡기나 그것도 아니면 잘 지내냐는 안부 같은. 나는 그렇게 살가운 성격도 아니고 부모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하게 신경 써드리는 딸은 아니라서 그마저도 대부분은 엄마가 전화를 한다. 그런데 아빠에게서 전화가 오면 무슨 큰일이 있는 건 아닌가 긴장하게 된다.
조금 긴장된 채로 여보세요 하고 받자 아빠야, 하는 목소리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아빠의 나이를 꼽아본다. 내일모레면 일흔. 이제는 영락없이 적지 않은 나이의 여느 할아버지와 다를 바 없다. 실제로 손주가 둘이나 있는 할아버지기도 하고 지하철역에서 신분증을 내밀면 무임승차도 가능한 나이다. 대뜸 계좌번호를 불러보라는 아빠의 말에 놀란 건 나였다. 아무것도 해준 것 없이 키우며 마음 아프게 하고 아무것도 못해주고 결혼시킨 것이 늘 미안했다며 돈을 조금 보내겠노라고. 나 그 돈 없어도 돼요, 우리 벌만큼 벌고 잘 살고 있으니까 괜찮으니 아빠 쓰세요 했지만 한사코 계좌번호를 달라며 전화를 끊지 않았다.
생전 안 하던 행동을 하시다니. 술드셨냐고 묻기엔, 내가 술을 못하는 이유가 부모님 두 분에게 받은 술을 못 마시는 유전자이기 때문에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순순히 계좌번호를 불렀다. 알았다고, 돈을 보내마 하며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제야 아빠 목소리에 생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늦게나마 딸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아빠의 이름으로 내 계좌에 입금된 기백 남짓한 돈을 보며 서슬 퍼렇던 시절의 아빠를 떠올렸다. 대단한 능력도 없었고 그렇다고 다른 집 아빠들처럼 주말 출근에, 야근을 하며 가열하게 살아온 분도 아니었다. 가진 건 목소리 큰 것 밖에 없었고, 가족들을 건사할 만큼 돈을 벌어다주지도 못했는데 성품은 완고하고 대쪽 같았다. 자식들이 공부를 못하거나 엇나가는 일도 없었는데 늘 목소리가 컸다. 때문에 상처 받은 일도 적지 않았고(이십 년 전 수능날에도 서러움에 울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일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늘 아빠와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빠의 기억만 가지고서 사회생활을 하며 그나마 있던 아빠와의 접점은 점점 없어졌다. 그러다 처음으로 아빠의 모습을 의아하게 생각했던 건 내 결혼식 때였다. 그리 어리지도 않은 나이에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남자와 하는 큰딸의 결혼식에서, 처음으로 아빠가 우는 모습을 보았다. - 그날 세 명의 남자가 울었다. 우리 아빠, 남편, 그리고 시아버지. 양가 어머니와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 살갑지도 못했지만 30년을 넘게 같이 살다가 ‘합법적으로’ 집을 나간다는데 아무래도 시원섭섭하시겠지. 코 끝이 조금 시큰하긴 했다. 신혼여행으로 결혼식 다음날 일찍 출국해야 하는 탓에 호텔에 묵었다. 호텔에 잘 도착했노라고 양가에 전화를 했었다. 우리 집에도 전화를 걸어 엄마 아빠와 통화를 하고 다른 가족들과도 감사의 안부를 전하는데 “느이 아빠 또 운다.” 하고 놀리듯이 말한 이모부의 말에 또 웃었다. 그리 살갑거나 애틋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왜 그러셨을까. 나보다 먼저 결혼했던 동생 결혼식 후에는 저런 모습 안 보였었는데. 묻지 않고서는 알 방법이 없지만 묻기는 역시 좀 민망하다.
지금은 친정에서 1시간 거리에 살고 있다. 시가에서는 1시간 반이 걸린다. 일부러 한 선택이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께 여러 가지로 상처 받은 일이 많았던 남편과 나는 양가에서 조금은 떨어진 지역에 살자고 합의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까지 아주 잘한 결정이라 말한다. 덕분에 밉고 불편한 감정은 다소 사라지고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의 마음을 몸소 알아가며 짠하기도 하고 애틋해졌달까.
아빠에게서 받은 돈은 계좌에 잘 보관해두었다. 머지않아 돌아올 아빠 칠순에 여행이나 기타 선물 명목으로 되돌려드릴 생각이다. 해외 우량주에 투자해두었으니(벌써 꽤 많이 불었다.) 수익을 더해서 돌려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상처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지금도 괴로움과 싸우고 있지만 뒤늦은 사과로나마 보상을 받은 것은 위로가 되었다. 미안한 마음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자기 자식이라도 직접 사과할 수 있는 용기, 그것 하나만으로 아빠를 조금은 용서하게 되었다.
아직 10년도 안된 초보 엄마로서 수십 년 경력자에게 또 한 가지를 배웠다. 사과하는 용기. 평소에도 늘 신경 쓰려고 하고 있지만 아빠 덕분에 아이에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바로 사과하는 것이 더 쉬워졌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었으니까 그랬을 거야 하고 이해도 해본다. 그리고 내 행동이 아이의 인격과 성격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더 많이 생각하고 행동해야겠다는 자기 성찰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