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거대한 벽 앞에 가로막힌 듯 고민과 걱정에 정체되어 있다가도 아주 사소했지만 좋았던 기억에 다시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생긴다. 참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멍청하게도 그 조그마한 기억으로 살아간다. 마치 그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다는 듯이.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그런 용기를 줬다는 걸 그들은 알까?
출장기간동안 추운 날씨에 짧은 양말을 신고 있는 걸 보고 긴 양말을 주겠다며 숙소에서 새벽까지 주무시지 않고 내가 복귀할 때까지 기다리셨던 H조명감독님. 억울한 일을 당하고 조용히 일을 그만둬야 했을 때 뒤늦게 알게 되어 너무 미안하다며 앞으로는 현장에서 절대로 이런 일 없게 방지해주시겠다고 본인 잘못이 아닌데도 미안하다는 연락을 주신 S감독님. 너무 힘들어 엉엉 울면서 그만두네 마네 할 때 새벽까지 함께 술을 마시며 날 붙잡아준 여러분.
쨍쨍 내리꽂는 햇볕에 각 팀 막내들끼리 가위바위보 해서 진 팀의 오야지가 쏘는 아이스크림. 낮씬이 끝나고 밤씬을 기다릴 때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촬영하기 힘든 장소일수록 아름다웠던 노을. 그렇게 힘들었는데 참 신기하게도 계절마다 계절냄새를 타고 오는 건 항상 좋은 기억들 뿐이다. 그래 이 또한 지나가겠지. 지금이 지나면 또 다음계절에 계절냄새를 타고 지금의 좋은 기억만 실려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