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기생충>에 관한 생각
독립한 후 처음으로 냄새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 공간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환기가 잘되지 않는 서울 시내의 흔한 원룸 구조에서는 옷에 쉽게 냄새가 밴다. 그때부터 세탁을 끝낸 후 최대한 통풍이 잘되는 곳에 곧바로 빨래를 널고, 향이 좋은 섬유 유연제와 탈취제, 디퓨저나 향초를 두는 등 ‘향’에 전에 없던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가리려고 해도 쉽게 가릴 수는 없었다. 어딘가 한 끗 부족했다. 냄새. 나는 왜 그렇게까지 냄새에 집착했지. 단순히 깔끔한 모습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오래전부터 주입된 ‘가난 혐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이 영화를 보고 해봤다.
학교에서는 항상 반에 왕따가 있었다. 집단에서 배제된 아이. 그런 아이를 두고 가장 흔하게 했던 말 중 하나가 “쟤한테서 냄새난다.”였다. 그때부터 다들 귀신같이 알아챈 것 같다. 어른의 보호를 받기 힘든 아이, 괴롭혀도 강하고 힘 있는 어른이 나타나서 혼낼 리가 없을 법한 사각지대에 있는 아이들을 또래가 더 동물적인 감각으로 골라내곤 했다. (정말 아이들이 골라낸 건지, 혹은 친구는 가려서 사귀는 거라는 일부 어른의 참견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돌이켜보면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학교에서부터 나는 배웠던 것 같다. ‘가난의 냄새’를 묻히고 다니는 건 부끄러운 일이야.
꽤 오래도록 “왜 누군가의 몸에는 냄새가 밸 수밖에 없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서 애써 피했던 것일지도. 그렇게 배척과 차별을 혐오한다면서 정작 가난을 혐오해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무리 보기 싫어도 보려고 하고, 맡을 필요가 없는 냄새를 맡더라도 곧바로 고개를 휙 돌리기보다 ‘왜’를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한다. 혐오는 피라미드를 타고 내려간다. 그러니까 한번 올라간(혹은 자기가 올라갔다고 굳게 믿는) 사람은 대개 절대 밑을 보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리 보지 않으려 해도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지하에서 사는 사람들. 영화 <기생충>에서는 그런 말로 사회의 안전망 바깥으로 어느 순간 ‘쫓겨난’ 이들을 표현한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존엄성을 보장받기 힘든 상황으로 내몰린 채 성매매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 노인, 일명 ‘박카스 할머니’라 불리는 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어느 순간 한 번만 삐끗해도 어디까지 아래로, 얼마나 어두운 곳까지 내려가야만 할지 알 수 없어서 우리 사회는 유독 다 같이 오로지 위로 향하는 것들을 욕망하라고 강요받는다. 떨어지면 답도 없다고 서로 겁주기에 급급하다. 혹은 지하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계획은 있니.”라고 걱정해주는 척 무심히 묻거나. (걱정이든 동정이든 속 빈 강정 같은 말로 때우지 말고 타인의 인생이 그렇게까지 안타깝다 싶으면, 차라리 돈으로 하자…)
발을 헛디뎌서, 혹은 예고 없이 억수처럼 쏟아진 비를 맞아서 순식간에 진창에서 몸을 웅크린 사람한테 애초에 그런 질문이 가당키나 할까. 누구나 좋은 패를 쥐고 태어날 수 없는 데다가 받아드는 패마다 마치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꽝’인 것만 들어오는 플레이어도 이 사회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애초에 가지고 있는 판돈도 다른데다 게임은 늘 불공평한데 심지어 나쁜 패를 가진 사람들끼리 싸운다. 기우의 가족이 저택에 발을 들인 방식이 결국 누군가의 일자리를 부당한 방법으로 갈취한 것처럼. 혹은 계속 나쁜 패를 받다 보니 아예 ‘포기’를 선언하는 이들도 있다.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채 의지할 대상을 찾아 맹목적으로 기생하는 사람들.
예전 같았다면 끝내 칼을 든 기택처럼 “그래, 저렇게라도 해야 벌레가 아니라 ‘사람’이지.”라고 쉽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점점 더 ‘어떤 냄새’는 유독 아무리 없애려 애를 써도 빠지지 않는다는 걸 자연스레 깨닫고 있는 요즘,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의 입장을 그렇게 간단히 무시해도 되는 건지 망설여진다. 다행히 어떤 냄새를 맡으면 코를 막고 얼굴을 찌푸린 뒤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곧장 갈 길을 가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똑같은 상황에서도 호들갑을 떨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직은 있다. 생활의 군내가 하나도 배어있지 않은 해사한 옷감 같은 것들이 그저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잊지 않고 싶다. 또 끝없이 타고 내려와 더 약한 자를 찾아내서 혐오를 재생산하는 구조에 더 많은 의심이 필요하다는 것도. 그런 의심을 품게 하는 <기생충>같은 이야기는 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영화가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