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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유미 Nov 19. 2019

계속 낮에 쓰고 싶은 사람

주로 글을 낮에 쓰시죠?

그런 말을 들었다. 밤에 쓴 글이 아닌, 낮에 쓴 글 같다는 말을.

사실이 그렇기도 했고, 듣기에도 좋았다. 나는 늘 내 글이 햇살이 쨍한 여름날 오후에 바싹 마른 수건 같았으면 했다. 비록 처음에는 물기를 머금어 축축하고 눅눅해 보이더라도 마지막에는 보송보송하고 가볍게 끝내고 싶었다.


어쩌면 겁이 많아서 부정적인 결과를 상상하는 것조차 꺼리는 성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습지를 탐험하는 모험가는 못 되는 것 같다. 도랑에 빠져보기도 전에 습한 기운만 느껴져도 가슴이 두근대서 도망치기에 바쁠 것 같다. (누군가는 회사도 그만두고 글을 쓰는 사람이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겁이 많고 현실적인 성향 때문에 손쉽게 연약해지는 밤에 기대어 쓰는 일이 아직은 어색하다.


그래서인지 줄곧 대낮에 썼다. 그것도 하루 중 해가 가장 길고 넓은 면적으로 넉넉하게 들어오는 그런 시간대가 되어야 비로소 집중해서 쓰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어떤 예술가들은 밤이나 새벽녘에 영감이 떠오른다고도 하는데, 나는 늘 밝은 대낮이었다.


오늘도 뺨을 얼얼하게 때리는 강풍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오후 2시에 카페까지 코트를 여민 채 걸어왔다. 얇은 코트에 치마, 스타킹에 앵클부츠를 코디하는 바람에 나 보기에만 만족스럽지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데에는 별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이렇게 나름대로 좋아하는 옷을 골라 입고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춥거나 바람 불거나 대낮에 글을 쓰기 위해 회사가 아닌 카페로 출근한지도 2년 차이다.


출근지는 매일 다르지만 언제나 카페까지 나가서 자리를 잡고 글을 썼다. 가능하면 항상 햇볕이 가장 잘 들어오는 자리에 앉는다. 그러고 나서 해가 가장 밝게 비추는 시간대부터 날이 어스름하게 어두워지기 직전까지 소설을 썼다. 교정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하는 시기처럼 나가는 시간조차 사치라고 느껴질 정도로 마음이 급할 때를 제외하면 늘 그렇게 바깥으로 나가, 그것도 가장 밝은 자리를 까다롭게 골라 앉은 뒤에야 쓸 수 있었다.


첫 소설집부터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린 모든 글이 온전히 낮 시간에 빚을 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작년 여름부터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내 글은 거의 모두 대낮의 햇볕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다.


날이 조금만 어두워져도 곧바로 쉬고 싶어 진다. 아무것도 안 하거나, 다른 사람의 좋은 글이 읽고 싶다. 어설프고 빈 틈 많은 내 이야기를 오밤중까지 붙잡고 있다고 생각만 해도, 그게 하루의 마지막 기억이라고 생각만 해도 어쩐지 서글프다. 이건 아마 “야근은 해로운 것”이라는 회사원의 감각이 아직 몸에 배어있어서 일지도.


그러니까 겨울엔 더 힘이 든다. 해가 긴 여름에는 쭉쭉 진도가 나가던 것들이 해가 짧아질수록 마음만 급해지지 진척이 없어서. 겨울 햇볕은 유난히 뾰족하다. 내 옆구리를 짧게 찌르고 지나가는 딱 그 정도다. 반갑기는 하지만 건드리기만 하고 쿨하게 지나가버리는 겨울 햇볕은 아쉽다. 여름에는 징그러울 정도로 끈적하게 내 몸에 하루 종일 붙어있던 햇볕이 온데간데없다. 사방이 어두워지면 곧 퇴근하고 싶어 지고, 그러면 분량을 다 채우지 못했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다. 날도 어두운데 이만 접고 가자, 유혹에 늘 항복한다.


그래도 다음 날이 되면 다시 출근한다. 짧디 짧은 햇볕을 받기 위해. 오늘 카페까지 걸어가는 동안 머릿속에 두 가지 생각뿐이었다. 하나는 밀크티, 너무 추우니까 빨리 가서 밀크티 후루룩 찹찹 다 마셔 버려야지. 나머지 생각은, 빨리 앉아서 쓰고 싶다는 생각. 쓰고 싶다는 감각이 모조리 사라지기 전에 Pages를 열어 키보드를 두드리고 싶었다. 쓰고 싶다는 마음 하나가 언제나 매일같이 나를 이 카페, 저 카페로 떠민다.


매일같이 다른 작업실로 출근하다 보니 하루하루 같은 일을 반복한다고 해도 다른 하루를 보내는데, 그저 흘려보내는 게 늘 아쉬웠다. 하루 중 가장 사랑하는 낮 시간에 작업 중인 소설 외에 무엇이라도 더 쓰고 싶기도 했고. 소설을 쓰기 전에 ‘예열’ 과정을 거치는 편이다. 주로 짧은 일기, 아니면 인스타그램 포스팅일 때도 있다. 무엇이든 짧은 분량의 글로 시동을 거는데, 그때 에세이를 한 편씩 써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물론 그건 아이디어였고, 그렇게 거의 반년 이상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낮에 쓰는 글’이라는 소재만 간직한 채, 아무것도 내보내지 않았다는 걸 한 계절이 지나간 후에야 깨닫고 위기감이 찾아왔다.


이제는 정말 써야 할 것 같아.

어쩌면 머지않아 낮 시간은 모조리 생업에 할애하고 귀가 후 저녁에나 글을 쓰게 될 것 같다는 예감 때문에라도. 물론 27일 예약 판매를 시작할 두 번째 소설집이 기적적으로 스테디셀러라도 된다면 예상은 비켜갈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그렇다면 로또 1등 당첨도 부럽지 않겠지만, 안타깝게도 3N년간 쌓인 내 직감은 말한다.

너는 곧 생업과 작업을 병행하는 ‘투잡’을 하게 될 것이야. (망했네. 열심히 살고 싶지 않은데!) 어쩌나, 인생이 나한테 실전이라고 말하는데. 필요한 선까지는 또 열심히 해봐야지.


그러니까 더는 대낮에 마음껏 쓰는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면 후회할 게 분명하니, 오늘부터라도 대낮에 소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예열을 위해 쓴 글을 한 편씩 내보내려 합니다. 주로 에세이가 될 테지만, 소설도 섞일 예정입니다. (무엇이 수필이고 무엇이 소설일지 맞춰 보시는 재미?)


제가 <일간 이슬아>의 발행인 이슬아 작가님처럼 부지런한 사람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조금은 게으른 연재가 될 것 같아요. 해가 점점 더 짧아지는 악조건(?) 속에서도 대낮에 완성한 글, ‘낮에 쓰는 글’ 이제 시작합니다.


느리게 쓸 테니 천천히 읽어주세요. 앞으로도 계속 낮에 쓰고 싶은 마음을 담아.


*커버이미지 출처: pixe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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