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유미 Feb 10. 2020

힘이 들면 늦어요

힘이 든다고 생각하면, 늦어요.

힘들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확실히 파악해두고 그때그때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야 해요. 


울면서 글을 쓰거나, 야근을 하지 않고 창작자로 10년을 버텨 냈다는 소설가 정세랑의 말이다. 그렇지, 힘들다고 느끼는 순간은 이미 늦은 거지. 왜 힘이 들도록 나를 방치해.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알고 있는데 참 실천하기는 어렵다.” 일단 시작하면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쏟아붓는 편인 나에게는 어려운 말이기도 했다. 운동을 이런 에너지로 했으면 평생소원인 11자 복근이나 등근육은 진작 생겼을 텐데. 에너지를 운동 같은 몸 움직이는 데에 쏟기보다는 온통 생각에 집중하는 편이라 문제라면 문제다.


뻣뻣하면 부러진다는데, 타고나기를 뻣뻣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실제로 몸이 놀라울 정도로 뻣뻣하기도 하고, 성향도 말랑말랑한 편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되어보려 했는데 도저히 안 된다는 걸 다행히 회사 생활에서 깨달았다. 다행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나마 적은 수업료를 치르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회사를 다니며 모아두었던 돈 덕분에 지금도 그럭저럭 먹고사는 중이니 사실상 수업료를 ‘치렀다’고 표현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요즘 나는 대체로 만족스러운 일상을 보낸다. 어떻게 포장해보아도 한 달 한 달을 연명하는 느낌만큼은 벗어날 수는 없어 때때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만 그래도 만족한다. 대낮에 카페에 앉아 페이지스를 열어 키보드를 두드리면 불안도 금세 사라진다. ‘나’라는 사람은 뭘 해도 그냥 ‘나’라서 지겨운데 소설을 쓸 때면 나라는 사람을 아주 잠깐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용감하고, 단단하고, 사랑 많은 인물이 나라면 절대 하지 못할 선택을 하고, 위험을 무릅쓴다. 소설 쓰기는 클리셰로 범벅된 내 일상에 조금이나마 다른 차원의 빛이 들어올 수 있게끔 꽉 닫힌 창문을 여는 행위다.


그런데 창문을 여는 일도 ‘일’이라고 수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창문 앞까지 걸어간 뒤 힘을 주어 문을 열어야 한다. 열고 싶다고 해서 매번 순순히 열리는 것도 아니다. 문을 열기 직전까지 내가 창문을 열어서 이득을 볼 게 무엇인지, 지금 창문을 열어도 되는 건지, 아니면 창문 열 시간에 지금 당장 침대에서 뭐라도 하나 더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글을 쓸 때도 수없이 많은 의심과 공격과 싸우게 된다. 다행히(?) 그리 유명한 작가가 아니라 평론가의 의심이나 독자들의 의심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지만 이따금 스스로 내 역량에 대한 의심이 들 때면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그날은 문을 여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제대로 글을 쓰지 못한 날에는 죄책감이 드는데, 이런 감정이 잦아지면 ‘울면서’ 쓰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즐겁게 쓰려면 역시 아무 생각이 없어야 하는데, 글을 쓰면 쓸수록 생각은 줄어들기는커녕 물을 먹은 솜처럼 불어나기만 한다. 이제는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도 모든 과정이 즐거울 수는 없다는 걸 깨닫고도 남은 나이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즐거운 노동을 상상하는 건 아직도 ‘일’에 대한 환상이 있기 때문일까. 어떤 조건에서도 노동은 그냥 고통인 건가 싶다가도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했던 순간을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힘이 들면 늦는다던데, 어떻게 하면 힘이 들지 않을까 고민하는 지금 이 순간 역시 생각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있다. 손익을 계산하고 가성비를 따지는 과정은 아무래도 글쓰기에는 영 맞지 않으니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은 이제 그만 싹둑 자르고, 점심을 챙겨 먹은 뒤 오늘 하루치의 글을 쓰러 바깥으로 나가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