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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유미 Jul 12. 2022

눅눅해지기 전에

털어내고 싶은 감정을 생각하며

거의 매일 아침 시리얼을 먹는다. 시리얼을 쏟아붓고 찰랑찰랑할 정도로 우유를 붓고나면 그때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눅눅한 시리얼을 싫어하다보니 숟가락질은 빨라질 수밖에 없다. 가끔 아침에 시나 수필을 읽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드물게 눅눅한 시리얼을 입 안으로 넣게 된다. 글을 읽다가 자주 멈추는 바람에 숟가락질을 하는 방법을 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시리얼을 한참 방치해둔다. 시 한 편, 수필 한 편을 겨우 다 읽은 다음 그제야 우유에 말아둔 시리얼이 생각나는 것이다.


아, 눅눅해졌는데. 어쩌지.


질척한 진흙 덩어리처럼 변해버린 눅눅한 시리얼을 먹으면서 진작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지만 늦었다. 달콤한 초코 맛은 좋지만 역시 바삭한 쪽이 취향이라고 생각하며 시리얼이 아닌 국물에 가까워진 오늘의 아침을 입 안으로 털어넣는다.


눅눅한 시리얼을 먹으며 후회하는 날엔 못다한 말들과 미뤄둔 감정이 생각난다. 진작 털어냈으면 좋았을 걸 껴안고 있느라 눅눅해진 그런 감정들.


사람을 만나 말을 많이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꼭 내가 눅눅한 시리얼이 되어버린 것 같다. 타이밍을 놓쳐버려서 해야하는 말은 하지 못하고,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말만 내뱉은 날이 많다. 말은 아무리 고르고 골라도 내뱉고 나면 후회될 때가 많다.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는 영영 내 생각을 알 길이 없으니 무한정 침묵할 수도 없는 노릇, 이래저래 표현의 수단으로서 '말'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곤란한 날이 많다.


예전엔 '말'이란 게 음성 언어에 국한되었지만 요즘 시대엔 카카오톡, 문자 메시지와 같은 짧은 텍스트도 '글'보다는 '말'에 가까운 것 같다. 즉각적인 답변을 요한다는 점에서는 음성 언어를 뜻하는 말과 비슷하게 순발력이 필요한데 상대의 얼굴과 손짓, 몸동작을 전혀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메시지를 건네는 행위가 목소리를 내는 일보다 더욱 복잡한 배려가 필요하다. 얼마전 그런 배려를 지속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을 하다가 이런 '말'을 계속 해줘야만 하는 사람과는 계속 파트너로 일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업무의 범위와 의무를 사전에 설명하고 이에 동의한 후에는 말 없이 결과로 보여주는 사람, 동료에 대한 험담을 포함해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 무뚝뚝한 유형이 나와 잘 맞는다는 결론을 내린 날에는 눅눅한 시리얼을 퍼먹는 아침처럼 후회만 남았다.


진작 말할 걸.


눅눅하고 찜찜한 기분이 들 때 말하지 않고 그러려니, 그럴수도 있으려니, 하고 넘어갔던 일들이 내 인내심을 갉아먹고 있었고 누군가에겐 불필요한 감정 낭비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역시 진작 '말'을 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건 쓸모 없는 후회인 게, 애초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나를 스쳐지나간 수많은 이들과 멀어졌을리도 없을 것이다.


여전히 하지 못한 말들이 엉켜 어느날 갑자기 눅눅하게 들러붙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런저런 말을 자주, 투명하게 나누어야만 한다고 믿는 상대와는 맞지 않는다. 오히려 말을 아끼는 태도가 몸에 익은 사람과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눅눅해지기 전에 털어냈다면 좋았을 말과 감정은 쌓여가지만 눅눅해질 때까지 아껴두었다가 혼자 남은 식탁에서 제 몫으로만 삼킬 줄 아는 사람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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