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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유미 Jul 27. 2022

부러운 시작

BL 드라마 보다가 갑자기 배 아파진 썰

올해 봄 BL을 공부(?)하면서 드라마 <시맨틱 에러>를 봤다. 작가 셋이 모여살았던 몇 달간 함께 식탁에 모일 때마다 반찬삼아 요즘 뜨는 이야기가 어김없이 언급되곤 했는데 그때 '대세'라 언급되었던 장르가 BL이었다. BL이야 친구들끼리 팬픽을 돌려보던 십수년 전부터 존재하던 장르였는데 그게 요즘엔 대세가 되었다는 게 좀 믿기지도 않았고 신기하면서도 또래 친구들의 문화를 그대로 흡수해 무리에 끼어들기 위해 노력하던 10대를 졸업하고나서는 도통 읽지 않던 장르였기 때문에 '요즘 BL'이 대체 뭘까 하는 마음으로 일단 드라마를 추천 받았는데 그때 <체리마호>와 <시맨틱 에러>를 알게 되었다.


세상에, 사랑 이야기가 이렇게 산뜻, 상쾌할 수가 있어?


헤테로 로맨스를 '보편의 감정선'으로 지정한 장르에서는 이런 사랑, 저런 사랑, 온갖 사랑 얘기를 많이 해와서인지 이제는 '사랑만으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는 것 같다. 사랑만으로는 밋밋해서 미스터리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고 음모에 맞서 싸우는 등 남주와 여주를 잇는 장치가 갈수록 어둡고 무거워지는 것도 같은데, BL은 그런 게 없어. 나 너 좋은데, 너는 아니야? 너도 나 볼 때 심장 뛰지 않아? 그럼 우리 좋아하는 거야. 사랑의 가장 찬란하고 따스한 부분만을 하이라이트처럼 펼쳐 보여주는 이 판타지적 설정에 왜 사람들이 빠져드는지 알 것 같았다. 게다가 풋풋한 주연 배우들까지.


특히 <시맨틱 에러>의 주연 배우인 박서함, 박재찬 배우를 지지하는 팬들의 행보를 지켜보며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한 번도 1위를 해본적 없다는 이들이 출연한 작품이 플랫폼 1위를 하고, 청룡시리즈어워즈 인기상을 수상하는 성취를 이룬 서사에 빠져들어 작품에 대한 지지와 작품을 연기한 배우에 대한 응원이 시너지를 내고 있는 것 같다. 배우로서의 경력이 길지 않은 신인인 두 사람을 응원하는 팬들은 아마 시작하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는 마음, 어설프고 덜 여물었더라도 예뻐보이는 '처음'을 함께하고 있다는 벅찬 감정이 있을 것이다.


문득 두 배우가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랑의 크기가 부러워서이기도 하지만 커리어에서 단 한 번 허락되는 찬란한 구간을 지나고 있는 배우들을 볼 때면 내 처음, 내가 처음 책을 냈을 때, 처음으로 소설을 썼을 때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글쓰기가 즐겁지만은 않다. 나에게 글쓰기란 '잘 해내고 싶은' 숙제 비슷한 것이 된지 오래다. 소설집 두 권, 에세이집 두 권 분량을 내면서 이제는 직업인으로서 나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수준도 높아지고 있다. 취미처럼 즐겁게 할 수만 있었다면 작업을 하는 시간이 지금보다는 덜 괴롭겠지만 아무리 힘 빼고 하자고 되뇌어도 대충 쓴 글은 그냥 대충 쓴 글이다. 대충 쓴 글에 그래도 완성했으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역시 초보자의 특권이다. 취미로 하던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달콤한 시간이다. 


그 시간을 건너와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한 것 역시 내 선택이지만, 가끔 이렇듯 시작하는 이들을 향해 쏟아지는 갈채를 목격할 때면 직업이 취미였던 순간으로, 한 문장만 써도 "훌륭하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퇴행의 욕구까지 피어오른다. 하이라이트가 지나간 자리엔 '그땐 그랬지'라며 짜릿했던 순간을 더듬는 미련만 남아있다. 미련의 시간이 길어지면 진작 마침표를 찍어버린 첫 번째 소설에서 써내려간 시간 속에만 갇혀있을 것 같아 불안할 때도 있지만, 이제 막 제 매력을 한꺼풀 드러내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타인을 바라보는 날이면 이렇듯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 초보자이던 시절을 더듬어보느라 시간과 마음을 쓰게 된다. 


촉망받는 '루키'라는, 단 한 번 허락되는 반짝이는 시절을 지나가고 있는 배우들의 차기작을 조용히 기다리며, 오늘은 글쓰기를 막 시작하던 때에 썼던 일기들을 꺼내보련다. 3년 전 나에게 인사해야지. 안녕, 너 참 힘들었구나. 그런데 너 그거 알아? 그냥 너 힘들 때 네가 보려고 썼던 글인데 사람들이 그 책 좋아해준다? 그리고 너 소설책도 하나 더 내고 사람들이 너 '작가'라고 부르게 된다? 지겹고 싫은 날도 있지만 그래도 글쓰기 만큼 좋아하는 일이 없다고 말하면서 3년 뒤에도 집에서 사부작사부작 글 쓰는 재미없는 사람으로 계속 살아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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