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테리어 공사를 앞두고 주방 레이아웃을 어떻게 하는게 좋을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됬다. 32평의 아파트이고, 주방 베란다 쪽을 보조 주방으로 확장 계획은 없어서 주방 사이즈가 꽤 아담한 편이다.
꼭 필요한 냉장고, 레인지, 개수대, 조리대를 위한 자리 외에 여유공간은 사실 별로 없어서 수납 공간의 효율이 정말 중요하다. 기존의 주방 레이아웃은 효율적이지 않아서 주방이 쓸데 없이 분주했고, 불필요한 움직임들이 많이 발생했으며 바닥도 쉽게 지저분해졌다.
손재주가 좋아 음식을 맛있게 잘할 수 있어도, 일단 주방에서 식재료를 다듬고 조리하는 과정이 수고롭고 쾌적하거나 즐겁지 않다면 요리를 할맛도 나지 않고, 얼른 빠르게 해치워야 하는 가사노동으로 전락한다.
이제 음식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취향, 문화적 요소, 개인의 가치관등이 반영된 것으로 인식이 바뀌어왔다. ‘You are what you eat’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다)라는 말까지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선택하고 먹는 음식은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데도 일부분을 차지한다.
지금은 기술적인 발전으로 훨씬 수월하게 요리를 할 수 있고, 전체적인 집의 인테리어와 어울리도록 하는 다양한 주방 디자인 솔루션들이 있어 주방 일에 대한 인식이나 품격이 높아졌고, 아름다운 주방은 로망이 된 시대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런 주방의 발전들이 다 어떤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위해 누군가에 의해 디자인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디자인이란 어떤 제약 조건과 요구사항 속에서 전략적인 선택을 하며 목표를 이루는 일련의 과정이다. 사용자의 변화되는 니즈에 따라 필요한것, 불필요한 것을 구분하고 작은 주방이라도 늘 창의적인 솔루션은 있기 마련이다.
오늘날 보편화된 주방의 모태는 1926년 오스트리아 여성 건축가인 마가레테 쉬테-리호츠키가 고안한 프랑크푸르트 키친 (Frankfurt Kitchen) 시스템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식사 행위는 항상 구성원들 사이에서 중요한 의식이자 생활의 중심이었지만 음식을 준비하고 조리를 하는 일 자체는 사회적 신분이 더 낮은 사람들이 담당했었고, 주방은 집 안보다는 바깥에 별도 공간에서 열악한 환경속에 놓여진 경우가 많았다.
19세기 쯤에는 주방이 주거 공간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당시 주방은 몹시 컸고 동선이나 레이아웃에 대한 계획이 체계적으로 짜여져 있지 않아서 주방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노동 강도가 높은 편이었다고 한다. 기능적이지 않고, 공간이 남는대로 있는대로 수납하게 되는 구조였다. 성별에 따른 역할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던 과거에는 여성이 주방 일을 전담하였고, 무급으로 가사노동을 담당하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1920년대 독일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대규모로 저렴하게 주택을 공급하는 건설 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프랑크푸르트에서 활동하던 도시계획가이자 건축가였던 에른스트 메이는 쉬테-리호츠키에게 주방 디자인을 맡겼다고 한다. 이 주택 프로젝트에 필요한 주방의 요구사항은 공간이 작고, 저렴하게 생산될 수 있으며 매우 효율적인 시스템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당시 외식 산업이 발달 되었던 것도 아니어서 참고할만한 효율적인 주방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기차나 선박 내 주방의 레이아웃을 참고했다고 한다.
불필요한 동선도 최소화하기 위해 주방의 메인 사용자가될 주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관찰하며 프랑크푸르트 키친의 동선을 기획했다고 한다. 공장의 각 라인에서 하는 역할이 명확하게 정해져있고 어떤 흐름에 따라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것에서도 영감을 받아 주방에서의 일도 불필요한 발걸음이나 중복되는 손 동작이 최대한 발생하지 않도록 치밀하게 설계했다고 한다.
1930년대에 나치가 이런 주택 사업을 중단시키기 전까지는 프랑크푸르트 주방 시스템은 10,000세대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 키친은 현대인의 삶과 여성의 역할에 큰 개혁이 있을 것으로 각광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일하는 시간이 얼마나 줄어들었든지 간에, 주방일 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었다. 그리고 주방에서의 일이 더 효율적으로 되긴 했지만 그만큼 더 일을 많이 하게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분야의 디자인이건, 디자인을 하는 의도가 중요하다. 왜 디자인을 하고 무엇을 위해 디자인하는지에 대한 목적이 명확하며, 다루고자하는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솔루션보다 중요하다.
프랑크푸르트 키친은 작은 주택에서도 효율적으로 필요한 것은 다 설치하고 수납할 수 있는 컴팩트한 주방을 시스템화 했다는 점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주지는 못했다는 관점도 있다. 쉬테-리호츠키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 외면 받던 여성들의 니즈를 해결하고자 가사노동을 줄이고 자기 계발을 하거나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주고자하는 목적으로 디자인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밀키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간편하게 요리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가전제품이 발달되었던 시기도 아니었고 집에서 요리를 하는 것이 지금처럼 취미로 발전시킨다는 인식도 없었기에 아무리 주방에서의 움직임이 효율화되었더라도 여성들의 노동은 극단적으로 줄지는 않았고, 어쩔수 없이 리소스가 투입되야했다.
지금의 아파트 주방의 모습은 크기에 따른 레이아웃 차이는 있지만, 이렇게 효율적으로 발전하고 시스템화가 될 수 있던 것은 쉬테-레호츠키의 프랑크푸르트 키친의 역할이 매우 크지 않았나 싶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당연한 라이프스타일 안에서도 다 나름의 진화과정이 있고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나는 내 살림을 차리게 되면 가능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요리를 직접 해먹고 싶다. 지금은 귀찮아서 잘 안해먹지만 내 건강은 나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나름의 신념이 있어서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나의 주방이 생기면 알차게 잘 해먹을 자신은 있다. 하지만 요리 자체를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고, 1인가구도 늘어나고, 외식문화, 배달문화, 식료품 새벽배송 등이 보편화되며 앞으로 주방의 모습도 보다 유동적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새벽배송으로 인해 냉장고 사이즈도 많이 줄일 수 있고, 커다란 개수대나 조리대, 레인지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릇 개수나 냄비개수도 많지 않을 것이고. 요리에 취미가 없다면 주방 면적을 줄이고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도 활용하는게 더 경제적일 것이다.
나의 경우엔 요리를 하는 것이 일상의 일부이고 건강에도 밀접하게 연결되는 부분이다 보니 요리를 할 때 최대한 즐겁고 쾌적할 수 있게 디자인하고 싶을 것 같다. 프랑크푸르트 키친처럼 좁은 공간에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기계적으로 요리를 하고 얼른 주방에서 나오는 것보다, 싱싱한 식재료를 정성스럽게 다루고 음식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잠시 앉아있을 공간을 만든다던지, 요리를 하며 음악을 들을 수 있게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놓을 자리를 마련 등을 통해 주방에서 머무는 시간도 행복할 수 있게, 요리를 하는 시간만큼은 걱정 근심을 잠시라도 내려놓을 수 있게, 사소한 일상 생활에서부터의 경험의 질을 높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