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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기자 Oct 25. 2019

졸업과 취직, 1막이 내리다

오디세우스의 귀환

신화 중에 유독 정감이 가는 캐릭터가 는데 오디세우스, 영어론 율리시스다. 말이 영웅이지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가끔 지질하게 굴다 실수도 하고 허세를 부리다 욕을 보는 지극히 인간미(?)가 넘치는 영웅이었다는 게 이유였다. 보통 영웅들은 미녀를 얻기 위해, 황금 양털을 찾아서, 혹은 비극적인 운명의 소용돌이에 말리거나 전화에 휘말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오디세우스는 병역 기피를 하려고 꾀병을 앓다가 들통이 나서 트로이 전쟁 길에 올랐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20여 년의 시간을 지중해 (지금 지도로 보면 참으로 작은 세계관이지만 당시로선 '세상'을 유랑하는 기분이었을지도)에서 미아처럼 표류한다.  한때는 왕이었다는 사람이 미숙한 소년처럼 객기를 부리다 외눈박이 괴물의 아버지인 포세이돈의 화를 사서 풍랑 속 물고기 밥이 될 위기를 여러 번 겪는다. 화려한 여성편력 끝에 한때는 정착을 할까, 달디 단 에 빠지기도. 그중에서도 압권인 건 '세이렌'의 일다. 뱃사람들을 홀려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세이렌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유혹을 떨칠 없어서 부하들에겐 밀랍으로 귀를 막게 하고 자긴 혼자 밧줄로 온몸을 뱃 기둥에 묶은 채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에피소드인데 이건 읽을 때마다 웃음이 나온다. 심정이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론 하는 짓이 정말 오디세우스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떤 작가가 묘사한 그림이 정말 가관이다. 동공이 잔뜩 확장된 채 무섭게 부릅 두 눈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고 입가가 벌어져 있다. 신입기자 시절, 향정신성물질을 흡입한 혐의를 받는 피의자들의 행동을 기록한 일일 업무보고서를 경찰서에서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늘 그 그림이 떠오르곤 했다. 그때마다 (지금도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해석하듯이) '세이렌'은 마약의 메타포였을 거라는 생각이 확신에 가깝게 들었다. 그런 걸 보면 오디세우스는 실존 인물처럼 참 일관성 있으면서도 layer가 풍부한 캐릭터다. 그래서 더 오디세우스의 신화가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Ulysses and the Sirens, Herbert James Draper


유학을 가기 오디세우스의 신화에서 위로 아닌 위로를 많이 받았. 기묘한 것이, 7~8개 후보 대학 중에 1순위로 넣었던 룬드대학교에 합격 오퍼를 받은 뒤 헬싱보리 캠퍼스 홈페이지를 우연히 검색하다가 이곳 학생 연극단이 펼쳤던 창설 기념 초연작이 '오디세우스의 귀환'이었단 걸 보고 운명을 느꼈던 게 생각난다. 여러 챕터 중가장 애정하는 장이 '오디세우스의 귀환'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디세우스는 그 모험을 하고선 종국 여행의 출발점으로 원점회귀하는 캐릭터다. 그 점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일반 동화나 신화 속 주인공들은 반려자를 만나 '리브 해필리 에버 앤 에버' 하거나, 장렬히 전사하거나, 오지랖 넓은 제우스나 헤라 별자리 주인으로 회생시켜 주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테크를 타는 게 정석이었다. 그런데 이 인간의 얼굴을 한 영웅 수구초심이라고, 보통 성공한 혹은 황혼기에 인생의 '단맛 쓴맛 짠맛'을 다 겪은 인물들이 흔히들 그렇듯이 여정의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늘 그렇듯, 그 원점은 더 이상 떠날 당시의 원점과 같지 않단 걸 알면서도 말이다. 오디세우스의 추종자가 많은 이유도 이 원점회귀가 이야기 전체완결성을 더하는 동시에 캐릭터를 더 사랑스럽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관광학에선 여행을 물리적 이동을 통해 특정 장소에 특정 기간 동안 머물다가 귀환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때문에 사람들이 '여행을 한다' 사실은 곧 역설적으로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 점에서 오디세우스는 '보통 사람들'의 전형이다. 오디세우스의 신화는, 신화인 척하면서 그렇게 보통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게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문학작품으로 오늘날 자리매김하는 이유일지도. 결국 장삼이사 아니, 악한에 가까운 무뢰배일지라도 끝까지 길을 걷다 보면 '고향'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이 곧 '영웅'이라는 것. 설령 신의 저주라 (오디세우스는 '미움받는 자'라는 뜻이다) 그의 의지를 꺾을 순 없다는 것을 신화는 말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런 캐릭터의 특성 덕에 오디세우스를 그린 미술 작품들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고 기억에 남는 건 유학길에 오르기 전인 2016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본 어느 작품이다. 다른 저명한 작가들에 비해 이름이 덜 알려진 Jean Charles Cazin(1841 - 1901)의 그림이었다. 영국에서 미술을 배운 프랑스인 화가라고 한다. 유학을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직장을 그 것인지 말 것인지. 도박판에 주사위를 굴리기  마음이 한없이 암담하고 끝이 안 보이는 터널 입구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시절이라  그 그림을 보고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어떤 남자가 턱을 괴고 해변가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원경엔 바닷가인 듯한 모래밭에 나무 조각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그림이었다. 멀리선 행인인 듯한 여자 두 명이 남자 쪽은 보지도 않은 채 한가하게 이야길 나누고 있다. 남자도 별 특징은 없지만 허리춤에 묶인 빨간 띠가 그림 전체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특징적 색감이라 이 남자가 그림의 주인공이겠거니..라고만 추측했다. 솔직히 처음 이걸 봤을 땐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몰랐다. 그러다 무심결에 고개를 떨궈 액자 아래 제목을 보곤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난파당한 오디세우스 (Odysseus after the shipwreck)'.


 Odysseus after the shipwreck, Jean Charles Cazin


추락하는 이카루스를 그린 브뤼겔의 그림이 사람들의 공감을 샀던 것처럼 이 그림도 보면 볼수록 미소 짓게 하는 그림이었다. 브뤼겔의 그림 속엔 저 멀리 태양열에 밀랍 날개가 녹아 떨어진 이카루스가 바닷속으로 처박히건 말건 생업에 정신이 팔려 밭을 가느라 여념이 없는 농부들이 근경 복판에 그려져 있다. 그래서 자세히 안 뜯어보면 그림이 이카루스의 신화에 관한 건지 모를 정도다. 이 그림이 좋았던 건 같은 이유에서였다.

신의 미움을 산 오디세우스는 하는 일마다 쪽박을 차섬을 벗어나려고 사람을 모아 배를 가까스로 구해서 탈출 길에 오른 참이었는데 이번에도 풍랑을 만나 부하들을 모두 잃고 배는 부서진 채 어느 섬에 난파됐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전재산을 날리고 혼자 남아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남자를 그린 것이었다. 비극을 관객들에게 설명해줄 배죽은 부하들, 심지어 바다조차 그림엔 보이지 않아 주인공이 더 애처롭다. 되레 옆에선 타인들이 한담이나 나누고 있다. 너의 슬픔과 고난 따위는 전혀 세상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듯이.

울부짖거나 망연자실해 하늘을 올려다보는 연극적 제스처를 취할 법도 하지만 이 화가가 그 오디세우스는 인상적이게도 희로애락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사고를 정지하고 앞으로 어찌할 것인지 플랜 B, 플랜 C를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습에 적잖은 위로를 받았.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이 그림은 한동안 내 휴대폰 배경화면을 차지했더랬다.


Landscape with the fall of Icarus, Pieter Bruegel








2 시작했던 여행의 1막이 막을 내렸다.
2년은 예상했던 바대로 빨리도 지나갔다. 그땐 내가 스웨덴으로 '회귀'한다고 혼자 생각했었. 5년 전 출장을 갔던 스웨덴으로, 더 오래는 10대 때 여행을 갔던 스웨덴으로 돌아간다고. 내 마음속의 고향은 스웨덴이라고 혼자서 상상다. 한국사회를 사랑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늘 불편하고 어색하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낯설고 힘들었던 이유도 한몫했을 테다. 예상대로 스웨덴에 도착한 첫날부터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이상한 편안함을 느꼈다. 지금에서야 털어놓지만 유학 가기 석 달 전 꿨던 꿈에서  거리를 헬싱보리에 처음 도착한 날 보고 느꼈던 그 이상한 기시감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럼 지금은?  잘 모르겠다.
여행을 끝낸 오디세우스는 어디론가 돌아가야 한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유랑길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여정의 끝에 있을 '이타카' (극 중 오디세우스의 고향이자 그가 다스리던 왕국)가 어디일지 짐작조차 안 간다. 밤새 베를 짜며 기다리고 있을 페넬로페가 누구일지도. 2년 동안 내 인생이 180도로 변했다. 성격뿐만 아니라 운명이 송두리째 바뀐 기분이 들 정도로.

그래서 이젠 미리부터 예상하던 오랜 습관을 버리고자 한다. 지난 일 년간 붙들고 있었던 진로, 미래에 대한 불도 이젠 놓아주려고 한다. 아직 나는 유랑을 더 하면서 세상을 경험하고 싶고 마지막 행로엔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날 기다리고 있다는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런 걸 보면 오디세우스가 자그마치 20년이나 꼬인 인생길을 걸으면서도 주위에 회유되지 않고 끝까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건, (유학 전의 어리석은 내가 생각했듯 어떤 사명감이나 소명의식 따위가 아닌) 그저 가족들과 내가 속해 있을 곳에 대한 한없는 신뢰와 사랑 때문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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