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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기자 Jun 10. 2019

2년의 석사 공부가 끝났다

논문 디펜스, 해방, 그리고 새로운 시작

대학교 때 중국철학을 가르치시던 교수님이 계셨다. 짧게 자른 은백색 머리에 스니커즈, 청바지를 즐겨 입던 교수님이었는데 수업도 명강이라 인기가 많았다. 어느 여름날 지쳐있는 학생들에게 수업 시작 전 북경대에서 연구하시던 시절 이야기를 꺼내셨다. "사무실에 가면 읽어야  책과 자료 더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너무 행복했다." 해맑은 동안에 미소가 가득 번졌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던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최진석 교수님이 방송에서 강의하시는 영상을 우연히 봤다. 여전하신 것 같았다. 아무튼 그때 그 기억이 강렬해서 '아 공부는 저런 분들이 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석사, 박사 따위 말들은 공부에 관심이 없었던 내겐 너무 동떨어진 단어인 것만 같았다.







논문 사본 제출. 5달을 태중에 품은(?) 아이를 떠나보내는 심정으로.


영국 쪽은 최종 논문을 책으로 만들어 제출한다고 들었는데 우리 학과는 위 사진처럼 그냥 달랑 프린트해서 학과 사무실에 제출을 마쳤다. (그것도 난 양면 인쇄로 냈다ㅎㅎ그래도 명색이 논문인데;) 오늘 아침 9시에 학교 도서관서 프린트해서 리셉션에서 스탬플링한 뒤 한참을 자리에 앉아서 쳐다보고 있었는데 학교 직원들 눈에 얼마나 미친년처럼 보였을까. 정말 아이를 보내는 기분이라 만감이 교차했다. 한글로 된 기사나 글은 많이 게재했어도 영문으로 쓴 논문만큼 애착이 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모국어 쓴 글들은 열 달을 품고 나와 지가 알아서 잘 크는 장남을 보는 기분이지만 영어 논문은 팔다리가 뼈만 앙상한 칠삭둥이, 심폐소생술 해서 인큐베이터에 넣어 키운 뒤 겨우 사람 몰골을 한 막둥이를 보는 기분? 아무튼 참 못생기고 미덥지 못한 자식새끼지만 유독 애착이 간다. 아마 이건 내가 논문을 쓰는 게 처음이라 그런 걸 테지.

 

논문 디펜스를 한 강의실.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눈 깜짝할 새 논문학기가 지나갔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로 험난했다. 5월 24일 최종 제출을 하고 현타가  기분이  가시기도 전에 열흘 뒤 헬싱보리에 내려와 6월 3일 디펜스를 했다. 올초부터 거의 5달간 논스톱으로 달려온지라 디펜스 즈음엔 삭신이 쑤시고 만신창이 상태였다. 유일한 소원이 동네 타이마사지 숍에 가서 1시간 누워 있다 오는 것이었을 정도로. 다른 아이들도 상황이 비슷해 보였다. 정원이 각각 30명이었던 Retail, Supply Chain 소속 동기들은 겨우 4명씩 디펜스에 참여했고 Retail 쪽 친구들은 4명  결국 논문 통과가  됐다. Tourism 섹터는 발군이라 10명이 디펜스에 임해서 전원 통과됐다! 통과가  논문들은 학교 publication 아카이브 LUP에 등록된다.


디펜스가 끝나고 Examiner와 개인 면담을 했는데 예상외로 칭찬을 해주셔서 귀를 의심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 그다음 날 기대치도 못한 학점이 나왔다. C 아님 D받겠거니 생각했을 정도로 내 논문에 대해 자신감을 상실한 상태였다. Examiner에게도 "솔직히 내 생애 처음 쓰는 논문이라 이게 맞는 방법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특히 analysis부분은 여전히 확신이 없네요"라고 털어놨었는데 저널 출판 이야기를 꺼내시더니(!) "이게 첫 논문이라면 좋은 시작(Good start)이네"라고 하시는데... 정말 그 한 마디로 그간의 모든 고생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단 걸 그분은 몰랐을 거다. 뭔가 기분이 헛헛해져서 학생들과 교수님이 다 돌아간 뒤 텅 빈 강의실에서 1시간 넘게 멍하게 앉아 있었다.


2년 Master Study의 화룡점정, Defense timetable.  끝나고 축배로 친구가 타준 베일리스 깔루아 밀크와 투보그를 꼴깍꼴깍.


참 웃긴 건 그동안 친구들과 서로 "너 그렇게 열심히 하다가 까닥 잘못하면 박사 될라"라고 농담하며 놀렸을 정도로 석사 생활이 고난의 연속이었는데 막상 디펜싱을 끝내니 그 빈 강의실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와, 2년이 후딱 갔구나. 정말 힘들었지만 그만큼 재밌었는데 참 아쉽다. 박사가 4년이 아니라 2년짜리면 참 좋을 텐데'. 

난 뼛속까지 실용적인 인간인지라 처음엔 이론 중심의 스웨덴 석사과정이 마음에 안 들었었다. 그런데 관광학 자체가 참 매력적인 학문인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난 교수가 되고 싶은 꿈도 없고 캠퍼스보단 직장에서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최종적으로 구직으로 결심을 굳혔지만 언젠가는 박사도 하고 싶다. 하지만 2년이라면 몰라도 내 인생에 4년은 너무 크다.  기간이 너무 아깝게 느껴진다. 그리고 지원하고 싶어도 난 논문조차 없었다. 저널에 퍼블리싱하고 프로젝트 경력 있는 지원자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판에 현실적으로 가망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라 올해 지원은 꿈도 못 꿨다. 마지막 지원이 나흘  6월 10일에 곧 닫히는데 프로그램 자체가 참 재미있는 내용이 많던데 그림의 떡 보듯 보고만 있었지..



6월 5일 학점을 받고 지도교수님께 연락을 드렸는데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졸업 후 귀국할 거냐. 논문을 아티클로 다듬어야 하는데 헬싱보리를 떠나버려 어쩌나 (5월 부로 웁살라로 옮겨간 상태였다). 박사 생각은 있느냐.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귀국 생각은 전혀 없고 지금 면접 계속 보고 잡 오퍼를 기다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꼭 박사도 하고 싶다, 저널 퍼블리싱에 기꺼이 참여하고 싶다고, 나도 모르게 입에서 제멋대로 말이 나왔다. 말하면서도 '정말 편하게 쉴 팔자가 아니구나' 하고 바보 같이 헛웃음이 나왔다. Psychics가 올해 말 출판운이 좋다더니 지금 쓰고 있는 책을 말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다른 출판(Journal publication)이었구나 싶기도 하고. 지금 잠정적으로 출판사랑  권이 계약된 상탠데 저널까지 더해지면 예정 출판  개다.. 과연   있을까? 마냥 좋다기보단 가끔 압도되는 느낌이다. 여유를 잃지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야 하겠지. 학대하지 않도록..


디펜스가 끝나고 오후 5시. 텅빈 컘퍼스


마음 한구석에선 직장 일하면서 따로 리서치까지 하는 게 토 나오게 힘들겠지만 정말 많이 배우겠구나, 재밌겠단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게 결국 본심이었던 거다. 박사는 나 같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다 라고 항상 제한을 뒀었는데. 지금도 나는 학문적인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에 유독 우수한 케이스를 많이 봐서 더 엄두를 못 냈는지도 모르겠다. 스웨디시 중에 학과서 성적이 좋아 스카웃돼 화공과 박사가 된 지인이 있는데 아티클도 3개나 는데 8년을 다니다 펀딩이 힘들어서 결국 접었다.. 그리고 친한 이란인 친구는 넘사벽 케이스인데, 덴마크에서 토목공학 회사를 다니다 룬드대 LTH 교수에게 스카웃 제의를 받아 스웨덴에 옮겨와서 PEAB에서 고연봉을 받으면서 2년째 일하고 있는데 그 교수(이자 회사 상관)의 지도와 회사에서 펀딩까지 받아서 박사 지원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아마 지금쯤 합격됐을 것 같다. 아무튼 하나같이 우수한 사람들이 박사를 하고 그 과정도 녹록지 않은 걸 보면서 나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솔직히 아티클 쓰는 건 정말 재밌을 것 같은데 이게 잘 되더라도 박사는... 과연 가능할까, 되더라도 4년을 버티는 것도 자신 없고 그 정도로 공부를 좋아하는 인간도 아니라 더 기대를 접게 되는 듯하다. 어쨌거나 모든 기회를 열어두고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정답인 것 같아 마냥 마음이 설렌다.


'전투가 끝났다'. 사본 제출까지 마치고 5, 6일 놀러간 Mölle와 Fredriksdal.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쉬는 게 얼마만이냐.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XX게 달다.


'못 먹어도 Go'  

2년 동안 내가 얻은 가장 큰 성과는 단지 가시적인 학위나 논문보다 내 자신의 가능성에 제한을 두지 않게 된 변화가 아닐까. 10대 때부터 늘 '상한선'을 잠정적으로 정해놓고 시작도 전에 빠져나구멍부터 마련해 놓던 악습관을 서른이 넘어서야 극복한 기분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진화 과정이 너무도 즐겁다. 2월부터 써온 논문. 특히 3~4월은 논문이든 구직이든 정말 열심히   달이었다. 디펜스 직전엔 포기하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지만 마지막까지 도망치지 않고, 자기변명하지 않고 최선을  했다. 비겁해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노력했던, 특히나 고생 많았 3~4월의 나새끼를 장하다,  한껏 안아주 싶다.








Acknowledgement에, 석사 지원을 생각하던 2년 전부터 생각해뒀던 사람들을 차례차례 적어나갔다.. 올초에 일이 엇박자가 나는 바람에 산소를 찾아뵙지 못했지만 잊지 않고 헌정 인사 올렸으니 서운해 하진 않으시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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