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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기자 Aug 27. 2019

봄 여름 여름 여름


웁살라에 온 지 석 달이 되어간다.

6월부터 여름 내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놀아제끼다가 요즈음 다시 수녀처럼 지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스르륵 침대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고양이 세수를 하고 도서관이나 카페에 앉아 책을 쓰거나 볼일을 보다가 저녁에 와서 놀다 잠이 든다. 석 달 동안 근방 지인들(상냥한 희나씨 포함..:))을 만나는 것 외엔 일부러 새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당분간 단순한 생활 패턴을 유지하고 싶어서였는데 얼마 전 다시 새 친구들을 만나고 있다. 어제 만난 Y도 너무 좋았다. 역시 사람들이 내 삶을 풍요롭게 한다. 가끔씩 집에서 도서관까지 이어진 긴 언덕길을 내려올 때마다 내 그림자를 밟으며 생각을 하곤 한다. 인생이 달다고



6월 졸업을 한 뒤 극도의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그 한 달만큼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릴 위해 준비된 꽃다발 같았다. 스카네의 화창한 여름 날씨와 졸업의 해방감, 애틋한 친구들과의 이별, 스웨덴에 온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 토끼와의 재회.. 그리고 자연, 자연, 자연...!


아 이 자연이란..!

나이가 들어선 지 자연과 전원이 주는 기쁨은 즐거움을 넘어 어쩔 땐 감동으로 다가온다. 5월 논문 마무리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밤에 창문을 열어젖히면 이슬을 잔뜩 머금은 잔디 냄새와 꽃내음, 씁쓸한 흙냄새가 4층 내 방까지 훅 밀려 들어왔다. 콧구멍으로 흐읍 흡 한참을 들이켜고 내쉬면 그날 하루 종일 짜증 나고 화가 났던 것들이 사라지곤 했다. 내가 이 맛에 산다 라고 중얼거리며.. 초록에 둘러싸인 현재에 감사함을 느낀다.



7월 워크퍼밋 때문에 힘 빠지는 일이 있었다. 때마침 토끼가 놀러 왔다. 산으로 들로 쏘아 다니며 놀았다. 하루 종일 정처 없이 걷다가 배가 출출하면 근방의 아무 숲이나 들어가 사과, 배, 체리나 베리를 한참 따 먹고 저녁엔 식후 아이스크림을 서로 싸우듯 뺏어먹다가 곯아떨어졌다. 녹음이 우거진 숲과 들, 반짝이는 호수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면서. 숲 속에 있으면 둘이 말 없는 작은 동물들이 된 기분이었다. 잡생각을 못 하고 노는 생활을 1주일간 하고 났더니 토끼가 다시 헤슬레홀름으로 돌아갈 때 즈음엔 세척이라도 된 것처럼 뇌가 깨끗이 포맷됐다. 언젠가는 꼭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 '에고가 없어지는 것'이 자연이 주는 큰 기쁨 중 하나인 것 같다.



오래간만에 같이 고 카트 Go cart를 타고 놀았다. 한국에서도 차 운전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었던지라 정말 최고였다. 헬맷과 이중 안전벨트 필수. 그런데도 가속 때문에 코너를 돌 때마다 차체에 온몸이 부딪혀서 한 번 레이싱이 끝나면 엉덩이, 팔, 무릎에 멍이 드는데 타는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이 안 날 정도로 너무 짜릿하고 재밌다. 처음 탈 땐 1분 54초였지만 지금은 24초로 기록이 단축! (심심하고 재미없는 스웨덴이지만 고 카트만은 예외입니다. 고 카트장은 스웨덴 전국에 다 있습니다. 특히 남자분들께 적극 추천합니다)



어린 시절 캔디 캔디란 만화를 좋아했었는데 키다리 아저씨, 신데렐라 스토리 같은 온갖 클리셰가 범벅이 된 만화긴 하지만 그 속의 메시지가 좋았다. 육친의 정이 그리운 고아 소녀가 인생길에서 이별과 이별을 거듭하다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깨닫고 (연인을 잃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가는 스토리. 아니 심지어 순정만화 주인공이었는데 캔디의 사랑은 이뤄지지 않았다. 두 번씩이나. 안소니는 요절하고 테리우스는 다른 여자랑 맺어지는 황당한 스토리 때문에 어릴 땐 이상한 만화라고 생각했었다.


캔디의 친구인 애니가 한 말 중에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사실은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슴 아픈 일들도 많을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얼마 안 되지만 행복한 순간들을 더욱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는 대사가 있었다. 순정만화 주인공이지만 인생은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았던 캔디. 애들이 보는 만화인 것치곤 제법 묵직한 작가 나름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가끔은 내 모습이, 아니 사람 인생 자체가 땅 속의 매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땅 속에서 16,7년을 빛도 못 보고 나고 자라다가 하늘로 날개를 펼치는 기쁨을 누리는 건 한순간, 한여름밤의 에 지나지 않는다. 그 세월 동안 인고의 나날들이 더 많은 게 인생의 참모습일지도.


7월에 불쾌한 일을 겪었지만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이런 상심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나. 내가 지금까지 마음먹어서 일이 안 된 적이 있었나? 기업에서 일도 하고 때려치곤 결국 하고 싶었던 기자 일도 해보고 유학도 오고 그밖에 내가 뜻했던 성취들을 다 이뤄내지 않았나.. 친구 A의 덕담처럼 어떤 길을 걷더라도 난 결국 목표를 이룰 것이다. 전 회사 선배들, 가족과 친구들... 좋은 사람들이 여름 내내 응원해 주셨다. 토끼는 '인생은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그러니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걸 하면서 즐기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말을 했었다. 정말 저 다운 합리적인 '답안'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큰 힘이 됐다.



나는 30여 년 평생을 미래를 대비하느라 현재를 살지 못했던 것 같다. 습관이 성격으로 굳어지고 트라우마가 성격이 됐다. 유학 중에도 친구들과 이야길 하면서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고 할 일들 때문에 편히 즐기질 못했다. "kim 너는 왜 매일 바쁜 거니"하는 아끼는 중국인 동생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미어졌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한 번뿐인 순간마저 즐기질 못한다니. 7월의 우여곡절은 그런 내게 다른 삶을 살아보라는 메시지를 던졌던 것 같다. 이젠 정말 땅 속에서도 순간순간을 즐기는 배짱이 같은 매미가 되고 싶다. 그럴 채비를 마쳤다.


7월이라는 허물을 2019년 여름의 끝자락에, 이렇게 벗어놓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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