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단계는 정말 고비였다.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어느 순간 '도대체 내가 왜 이걸 계속해야만 하는 거지' 하고 그만둬야만 하는 이유를 스스로 창조해내려고 발광하는 지점에 이르는데 3단계가 나한텐 딱 그 시점이었다. 물론 불어가 아니라 다른 언어를 배워도 늘 찾아오는 주기적인 현타 내지 슬럼프이기 때문에 그리 심각한 건 아니다.
그래도 그나마 취미로 배우는 거라 현타가 덜한 것 같다. 만약 누가 날 호되게 몰아치며 가르쳤거나, 졸업/승진시험 때문에 자격증을 따려고 이렇게 배웠다면 중간에 백퍼 포기했을 것이다. 난 억지로 시키면 더 격렬하게 안 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右사진] 윤재 학생이 틀리게 말해서 선생님이 빵 터진 장면을 캡처한 사진인데...... 솔직히 나도 도긴개긴 똑같은 수준이라 마냥 웃음이 나오지만은 않더라..
배운 지 석 달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성수 일치는 어렵다. 특히 성별 명사와 형용사를 구분하는 게 고역이다. 아직도 여전히 배우다 보면 '이건 왜 이럴까.. 이건 왜 남성 명사일까..' 하면서 이유를 따지고 있다. 언어학자가 될 게 아닌 이상 왜?라는 질문은 언어 학습에 되레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카오스 속에서 규칙을 발견해서 조금이라도 쉽게 암기하려는,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내 무의식의 발버둥일 것이다.
뭔가 필기를 굉장히 열심히 한 척한 사진이지만 사실 저 장만 저렇고(촬영용) 나머지는... 음..
그래서 조금이라도 쉽게 외울 순 없을까 해서 나름대로 규칙(?)을 만들어 봤다.
추측하건대 집안일에 따라 성별이 다른 걸 보면 과거 봉건시대 프랑스는 하녀/집사가 있었으니까 그 주체에 맞게 단어의 성별이 주어진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le menage(house chore). 집안일은 보통 가부장제 사회에선 여자가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왕족들과 귀족들 집에 집안일을 총괄 관리하는 집사나 비서가 있었을 테고 으레 남자였을 것이니 오케이, 남성 명사.
기타 요리에 관련된 단어는 부엌에 하녀들이 많았을 테니 여성명사가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제빵사 중에 남자 하인이 없을 순 없었을 거니까 une baguette를 만드는 여자랑 un croissant을 만드는 남자가 있었겠지, 그리고
Scenes from <marie antoinette (2006)> 소피아 코폴라가 연출한 역작. 지금 봐도 아름답다
피아노는 예로부터 남성 음악가들의 전유물이었으니 du piano가 맞는 것 같고 기타 연주는 드물게 여자 예인도 있었을 테니까 de la guitare라고 머릿속에서 나만의 프랑스 귀족 대저택을 상상한 뒤 그들의 일상사 장면을 망상하면서 외우고 있다.
장보라고 하인을 보냈는데 물품 하나만 사서 오면 주인한테 싸다구 맞을 거니까 faire les courses, 반드시 복수형을 써야 하는 거고. 궁전이나 대저택에 화장실이 하나면(베르사유궁엔 화장실이 없었다지만) 이것도 국왕한테 싸다구 각이니 toilettes, 복수형으로 써야 하고.. 이런 식으로 머릿속으로 열심히 로판 웹소설을 쓰는 중이다.
바캉스의 나라 프랑스에서 휴가가 하루뿐이라면 천인공노할 일이니 vacances, 복수가 되어야 한다 (이건 내가 휴가에 워낙 목숨 거는 인간이라선지 잘 외워졌다). 근데 그래 놓고 주말인 week-end는 단수로 쓴다. 근본 없는 영어 표현인 weekends에서 따온 외래어라고 취급도 안 해주는 건가.. 아무튼 불규칙이 너무 많다. 이건 그냥 외우자.
예전에 미니 학습지 1단계를 시작할 초반에 다른 학습자들이 쓰신 후기 글을 참고 삼아 봤는데 어떤 분이 ‘영어로 먼저 문장을 생각한 뒤 불어로 치환하는 식으로 공부하고 있다’고 쓰신 글을 봤다. 3단계에 들어가면서 문장 길이가 길어지고 인칭별 활용도 다양해지다 보니 그때 그분이 말씀하신 내용이 생각났다. 그래도 내가 공부할 때 적용을 해봤는데 그 팁이 큰 도움이 됐다. 일단 한국어는 불어와 거리가 먼 언어인 데다 문장 순서도 반대이기 때문에 한국어로 먼저 생각한 뒤 불어로 이해하려 하면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빨리 연상이 안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난 뒤 복습할 때도 애를 먹었다. 반면에 영어와 불어는 친척 관계라 익힐 때 서로 도움을 주는 것 같다. 그래도 영어 배운 게 유럽어 배울 땐 도움이 되는구나 싶다.
그런데 그것도 사람 나름이지.. 간혹 영어, 불어, 어쩔 때는 거의 다 잊어먹어 가는 스웨덴어까지 머릿속에서 믹스가 되어서 버그처럼 서로 상충되고 버벅댈 때가 많다. 보통 외국에서 오래 사신 나이 지긋한 주변 지인들 보면 한국말을 하면서 영어를 섞어서 말씀하시는 경우를 자주 보는데.. '뭐야, 버터 먹었다고 잘난 척하는 거야?'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그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여러 언어 지식들이 호환이 잘 안 되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생각한다.
석사 때 진짜 언어감각이 탁월한 친구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친구는 한국어를 5달 배웠는데 발음이 3년 배운 사람보다 좋았다. 일어는 학사하면서 능통하게 구사했고 화교 출신 인도네시아인이라 중국어, 인니어까지 하는 데다 국제학교를 다녀서 영어는 당연히 잘했다. 석사 1년 때 스웨덴어를 초급까지 배우다 때려치우고 2년 차 때 프랑스 대학원으로 교환학생을 갔는데 그때 불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기 시작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때 내가 그 친구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단순히 머리가 비상한 걸 넘어 (머리가 비상한데도 외국어 습득력은 평범한 사람들은 많다) 첫째, 여러 개의 상호 상충되는 언어 지식을 빠르게 습득하고 둘째, 호환력이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보통은 저렇게 잡다하게 외우면 버벅거리는데 그 친구는 그런 현상이 적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언어는 타고나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런 게 어딨나, 초졸 할머니도 하는 게 영어고 불어고 한국어인데. 언어는 그냥 언어지 학문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지만 multi lingual에 국한한 부분에서는, 저 친구를 본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 특히나 유럽 언어는 뿌리가 같아서 서로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안으로 파고들수록 많이 다른데 이런 총체적인 지식을 소화할 줄 아는 - 물론 시간과 노력이 쌓이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 그것도 단기간에 제어할 줄 아는 특별한 능력이 그에게는 있었기 때문에.
생각해보니 오스트리아 여자, 아니 어린애가 프랑스까지 정략결혼으로 와서 불어 배우기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데 금수저 셀럽 걱정을 내가 왜 하지 현타가.. 걍 한 자라도 더 외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