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초 휴가차 한국에 가는 비행기 안에서 2017년에 개봉된 '덩케르크' 영화를 보고 감동의 늪에 빠졌다. 결국 가는 길 비행기에서 2번, 한국 도착해서 1번, 오는 길 귀국행 비행기에서 1번을 더 봤을 정도로 너무나도 맘에 드는 작품이었다. 공교롭게도 한국 도착한 다음날인 6월 6일은 현충일이자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 디데이이기도 했다.
그래선지 한국 오자마자 아버지(전쟁사 마니아라서 나에게 주말이나 휴일마다 어디 어디를 가보라고 어드바이스를 주는 도슨트 역할을 하고 있다. 문제는 전부 다 옛 전쟁터나 작전수행지, 무슨 종전 서약 조인을 했다는 열차가 있다는 역사적 장소뿐이라는 거다)에게 거품을 물면서 '덩케르크' 이야기를 했더니 이것저것 관련 영화들을 소개해 주셔서 같이 봤는데 그중 하나가 디데이를 배경으로 당시 무명/유명이었던 당대 할리우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지상 상륙 대작전 The Longest Day'이라는 흑백영화였고 하필 그걸 본 날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디데이였다. 우연히 봤던 영화 '어톤먼트'와 다큐 '샐린저'마저도 공교롭게 저 시대와 노르망디가 배경으로 나왔다. 샐린저가 디데이에 상륙해서 방첩 업무를 하고 있었다. 그다음 주에도 조간신문에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특집 기사로 가득했고 방송에서 노르망디와 칼레 이야기를 방영해준 덕택에 푹 빠져 살았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이 영화를 보기가 오랫동안 내키지 않았었는데 지난 3월 18일에 덩케르크를 경유해 칼레로 여행을 간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그 일대'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과 내가 사는 동네까지 다 전쟁터였다는 설명을 해주셔서 줄곧 귓가에 그 말이 맴돌았다. 그런데 영화를 본 뒤로 3월에 칼레를 다녀왔으니 이번에는 기필코 덩케르크를 가보고 말리라 생각해서 8월 6일 당일치기로 덩케르크에 결국 가게 됐다.
5단계 6주차 프랑스 살롱 시간에는 프랑스 전국의 유명 관광지를 소개해주셨는데 매우 요긴했다. 깨알 같이 받아 적었고 Etrétat, Normandie, Lyon에 가보고 싶어졌다
덩케르크 이야길 하다가 갑자기 <미니 학습지> 프랑스어 이야기로 넘어가서 흐름이 부자연스럽긴 하지만(오늘내일 일도 아니고) 그래도 잠시 짚고 넘어가자면, 벌써 5단계가 끝났다. 원래 8단계까지 올해 12월에 종강할 예정인데 머뭇거리는 사이에 벌써 절반을 넘기고 5단계 후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4단계가 극악의 난이도였던 것 같고 그때 제일 포기하고 싶었다. 하필 여름휴가까지 끼어 있어서 학습의욕이 더 저하됐는지도 모른다. 4단계가 현재형 동사의 인칭 변화와 활용에 대해서였다면 5단계는 본격적으로 시제에 관련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양파 같은 '프랑스어 시제'의 세계
한국어는 과거-현재-미래처럼 깔끔하게 끊어지는 문법을 갖고 있다. 영어를 처음 배웠을 때 어려웠던 점 중 하나가 '과거완료'라는 과거이지만 동시에 진행형인 시제가, 과거-현재-미래에 더해졌던 것이었다. 그런데 프랑스는 여기에 한 술을 더 떴다. 대과거-근접과거-현재-근접미래-단순미래로 복잡해지는 걸 보면서, 시제와 시점에 관해서는 다른 국가의 언어보다 훨씬 섬세하고 정교한 언어라는 점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etre와 avoir 동사나 불규칙 동사의 변화형은 또 따로 외워야 해서 초반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개인적으로 가장 어렵다고 느꼈던 4단계에서 훈련이 되어선지, 또 얼마나 괴랄하게 변동할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얌전하게(?) 변화해서 좀 쉽게 느껴졌다. (야구 빠따로 맞다가 죽도로 맞는 기분?) 어쩌면 4단계까지 배워온 내용들이 축적된 상태에서 그 위에 응용 표현이 더해졌기 때문에 느꼈던 일종의 착시현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이번에 덩케르크를 가면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고속도로를 운전하다가 'Sortie prochaine'라고 적힌 표지판이 저절로 읽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거리 표지판, 간판, 토끼 그림과 함께 nettoyage 어쩌고라고 적힌 봉고 차량(아마도 세탁소나 청소업체 차량 같았다), 해변가의 각종 표지와 안내문, 심지어 화장실 문이 고장 났는데 평소 같으면 몰랐겠지만 누군가 포스트잇에 갈겨써서 붙여둔 'ferme pas la porte! 문구도 저절로 읽혀서 놀라웠다.
불어를 올해 1월 중순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2달 남짓 지났을 무렵 칼레에 갔을 때는 여전히 까막눈이라 아무것도 안 읽혔다. 그런데 그 뒤로 불과 5달이 지났는데 막 눈에 단어들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경이롭고 감동적이었다. 해변가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데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녀 청소년들이 스치면서 한 대화가 무슨 뜻인지 알았을 때의 그 기분. 외국어는 이런 맛에 배우는 것 같다. 암호해독을 하는 느낌, 모르던 상형문자 같은 기호의 규칙성을 발견하고 디코딩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사력과 이해도를 점차 발전시켜나갈 때의 그 묘미와 쾌감(제발 포기 안 하고 그 정도 경지까지 가얄텐데). 아 고생해서 배운 보람이 있구나 싶기도 하고. 이래서 언어를 학습할 때는 그 국가에 짧게 여행이라도 자주 가서 동기부여를 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덩케르크를 다녀간 뒤로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이 더 재미있어져서 주말마다 일부러 프랑스에 가려고 하고 있다. 사실 네덜란드나 독일, 룩셈부르크 쪽도 가보고 싶은 곳이 있지만 이날 덩케르크에 갔을 때 해변가에 늘어선 순백의아파트들, 그 너머로 갑자기 나타나는 검푸른 바다, 끝도 없이 펼쳐지던 수평선과 거대한 사구, 고운 입자의 백사장 위에 일광욕을 즐기던 형형색색의 피서객들, 살이 타는 것처럼 뜨겁던 햇볕, 때때로 불어오는 바다내음 섞인 바람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고요한 공기 위에 간간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들려오던 프랑스어가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서 일 테다.
토미가 영화 초반에 총알을 피해 달렸던 거리와 담벼락, 삐라를 주워 뒤를 보던 장소가 있는 Rue Belle Rade. 평범하게 그지없는 주택가다. 놀란 그는 정말..
수평선 너머를 물멍하고 있자니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 과거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던 전쟁터였다는 사실이 새삼 믿기지가 않았다.(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고 했나 정말 인생무상이다) 노르망디를 가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헤밍웨이, 생텍쥐페리, 샐린저, 로버트 카파도 그곳 노르망디에 있었고 어딘가 부서진 채 고국으로 귀환해서 무언가를 기록으로 남기거나 혹은... 부서졌다. 영화나 기록물을 보다 보니 그 사람들 생각이 났다. 원래 작가건 배우건 기본적으로 어딘가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앓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새삼 연민이 갔다.
스웨덴에 있는 친구 G와 아버지에게, 각각 저 시절에 태어났으면 뭘로 지원했을 거냐고 물어봤는데 아버지는 조금이라도 시신 수습할 확률이 높은 육군을, G는 공군이 매력적이지만 후방에서 엔지니어로 일했을 것 같다며 역시 육군을 택했을 것 같다고 했고 나 역시 (생텍쥐페리 때문에 공군에 로망이 있지만) 기술도 없고 아는 짓이라곤 글 쓰는 게 다라 별 수 없이 육군으로 가서 방첩 일을 택하지 않았겠냐며, 그럼 우리 다 만났을 수도 있었겠다며, 그때 안 태어나길 천만다행이라는 훈훈한 결론에 도달하며 대화를 매듭지었다.
요새 미친 듯이 여행을 다니고 있다. 날이 더워서 집에 퍼져 있느니 여름이 끝나가기 전에 부지런히 여행이나 다니는 게 나을 성싶다. 추위가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돌아다녀야 한다. 최근에는 주말만 되면 차 타고 계속 당일치기 여행을 하는데 기분 내키는 대로 하는 여행이라 출발하기 바로 한 시간 전에 행선지가 바뀔 때도 있다. 오늘만 해도 뒤셀도르프에 가려고 했는데 거리에서 속삭이는 듯 들리는, 그 귀가 간지러운 프랑스어를 더 듣고 싶어서, 그리고 동물원에 간 지 오래된 것 같아서 급하게 릴에 가기로 했다.
유럽에 산다는 것의 특권 중 하나가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가끔 이곳에 사는 한국인 지인들과 이런 주제로 이야길 나누곤 하는데 워라밸이나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도 누릴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가깝게는 1-2시간 내로 국경을 넘어서 자유롭게 외국에 갈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메리트다. 당일치기로 유럽에 갈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혜택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늦은 브런치를 먹은 뒤 오늘은 어딜 갈까 생각한다. 지인과 마음 내키는 대로 1시간 전에 행선지를 바꾸기도 한다. 명색이 이웃나라에 가는 건데도 공항에 갈 필요도 없고 비행기를 탈 것도 없다. 여권이나 신분증을 챙길 필요도 없으며 여분의 옷이나 짐을 챙길 필요조차 없다. 그냥 점심 먹고 집에서 입던 홈웨어 차림으로 차 키와 면허증, 지갑과 카드 여러 장, 약간의 현금(현금만 고집하는 나라들이 있어서)과 여분의 핸드폰 바테리를 챙기고 길을 나서면 그만이다. 이 후기를 쓴 뒤에도 바로 프랑스 국경 마을 릴 Lille에 있는 동물원에 갈 예정이다.
요새는 휴가철이라 어딜 가도 붐빈다. 길목마다 넘실대는 사람들을 보면서 새삼 다들 코로나 때는 어떻게 견뎌낸 걸까 하고 또 감탄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