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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우 Aug 17. 2021

400억 날리고 망하기 직전에 겨우 살아난 게임 회사


출처=크래프톤

     
“100명의 사람들 속에서 최후의 1인이 되어라”
     
배틀로열 컨셉의 서바이벌 슈팅게임 배틀그라운드.
     
배그는 2017년 출시돼 한국 게임의 역사를 새로 쓴 작품이다. PC용으로는 전 세계에서 7천 만 장 이상을 판매했고, 모바일 게임에서는 누적 가입자 수 10억 명을 돌파했다. 출시 79일 만에 1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스팀 내에서 동시 접속자 수 200만 명을 넘어서는 첫 번째 게임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무서운 파급력을 보여준 배그를 만든 크래프톤은 장장 10여 년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실패를 겪어왔다. 혹독한 자금난, 구조조정, 흥행 실패, 경영진과 제작진의 불화 등 게임 회사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고초를 겪으며 지금의 크래프톤을 만들어 냈다.
     
배그가 탄생하기까지의 뒷이야기, 크래프톤이 ‘게임 제작의 명가’가 되기 위해 걸어온 그 10년의 길을 압축해 소개한다.  
     
     
벤처기업인과 게임 제작자가 만나다
     
크래프톤은 2007년 ‘블루홀 스튜디오’라는 사명으로 첫 문을 열었다. 성공한 1세대 벤처기업인의 대표주자인 장병규와 엔씨소프트 게임 제작자 박용현이 손을 맞잡아 시작했다.
     
장병규 의장은 네오위즈, 세이클럽, 첫눈 등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업계 내에서 ‘미다스 손’으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박용현은 리니지2를 제작 총괄한 인물로, 엔씨소프트를 반석 위에 올려놨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박용현은 장병규에게 “3년 300억”이라는 투자조건을 내걸고 세계 최고의 MMORPG(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을 만들겠다 선언했다. 박용현은 리니지2를 함께 제작한 황철웅, 김정한, 박현규와 뜻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존의 게임회사가 아닌 제작자를 위한 게임회사를 만들고 싶어 했다.
     
당시 장병규는 게임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박용현 팀의 능력과 됨됨이를 보고 공동 창업을 결정했다.
     
이후 장병규가 네오위즈에서 함께 일했던 김강석을 데려왔다. 그렇게 경영과 제작 분야로 나뉜 창업자 6인이 모여 블루홀 스튜디오를 창업했다.
 
박용현 팀이 이끄는 프로젝트 이름은 S1. 300억 짜리 초대형 온라인 게임 개발 프로젝트였다. 당시 MMORPG 제작을 위해 40~60억 정도의 제작비가 들어가면 대작으로 취급받았다. S1은 ‘액션성을 극대화 한 사실적인 전투’를 목표로 내세웠다.



블루홀 스튜디오 로고


  
첫 프로토타입은 성공적?
     
2008년 3월 프로젝트 S1의 프로토타입(본격적인 상품화에 앞서 성능을 검증ㆍ개선하기 위해 핵심 기능만 넣어 제작한 기본 모델)이 선보여졌다. 창업자들과 몇몇 직원, 외부 전문가들이 모여 15분간 게임 장면을 지켜봤다.
     
S1은 타기팅 기술이 아닌 논타기팅 기술을 게임에 도입했다. 공격 대상이 명확하게 정해지는 타기팅 기술과 다르게 논타기팅 기술은 공격 대상과 범위가 한정되지 않는다. 대상을 지정할 필요 없이 칼을 휘두르기만 하면 칼을 뻗는 범위 안에 있는 모든 몬스터에 공격을 가할 수 있다. 공격 대상과 범위가 한정되지 않아 더 자유롭고 사실적인 플레이가 장점이 있었다. S1은 구현이 어려운 논타기팅 기술을 MMORPG에 자연스레 구현했다. 
     
S1은 수준 높은 게임, 혁신적인 시제품이라는 평을 받았고,  블루홀 내에서는 성공에 대한 기대감으로 고취됐다. 

     
버그로 삐걱거리다
     
2009년 첫 MMORPG 테라는 공식 출시를 예고하고 CBT(게임의 버그를 찾거나 시장성, 게임의 재미 등을 검증하기 위해 진행하는 비공개 테스트) 게이머를 공개 모집했다.
     
테라는 게임 내 퀘스트 대신 전투에 집중했는데, 고객과 퍼블리셔(배급사) 모두 퀘스트가 필요하다고 입 모아 외쳤다. 그래서 블루홀은 스트리가 빈약한 테라에 이야기를 채워 넣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퀘스트를 급조해 게임에 욱여넣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개발진의 우려가 증폭되기 시작했다. 레벨에 따라 정해 놓은 콘텐츠를 초반 경험에 끌어 쓰다 보니 게임 후반에 쓸 콘텐츠가 부족했다. 퀘스트 몇 백 개를 게임에 급하게 넣다 보니 전체적인 게임의 밸런스가 흔들렸다.
     
출시까지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퀘스트를 짜내다 보니 버그도 잦아졌다. 버그 1개를 고치면 2개가 생겨나는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성공적이었던 프로토타입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제작진이 동일한 이상형을 추구해 얻은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200여명으로 불어난 제작진은 테라 개발을 놓고 서로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다.
     
제작이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경영진과 제작진 사이에도 견해차가 생겼다. 기대에 맞는 결과물이 마일스톤마다 나오고 있는 것인지 경영진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경영진과 제작진은 조금씩 엇박자를 보였다. 그때가 테라 출시 일정이 반년이 채 남지 않았을 때였다.
     
     
경영진과 제작진의 갈등
     
경영진 김강석은 OBT(CBT 이후 상용화에 앞서 마지막으로 진행하는 베타 테스트) 몇 주전 8시간 내내 테라를 플레이했다. 그리고 그는 마우스를 바닥에 던지고 욕설을 내뱉었다. 재미가 없고 결함도 많았다. 그는 OBT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제작팀 박용현은 OBT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테라 정도면 동시 접속자가 10만 명 이상이라도 가뿐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둘 사이 고성이 오가고 물건을 집어던졌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가까스로 김강석과 박용현은 출시 일정을 뒤로 미뤄 OBT를 하기로 합의했다. 출시 일정이 밀렸기 때문에 그때까지 블루홀은 자금 조달 문제에 허덕였다. 장병규가 개인 자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간신히 회사를 유지했다. 

블루홀은 미룬 일정에도 OBT를 하지 못한 채 또 출시를 두 달 연기하고 말았다. 출시 일정이 일 년 미뤄지면서 ‘3년 300억 원’에서 ‘4년 400억 원’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그때 경영진 장병규와 김강석은 돈을 꾸러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일이 주요 일과였다고 한다.
     

제작으로 주목받았지만..? 오픈 빨?
    
20011년 1월 테라는 우여곡절 끝에 OBT를 선보였다. 테라는 검색어 순위에서 오르내리는 등 화제가 되며 동시 접속자 수 26만 명을 기록했다. 정식 출시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PC방 점유율 1위에 오르며 파죽지세 인기를 내달렸다. 서비스를 시작한 지 한 달 때, 동시 접속자 수 13만 명을 기록하며 테라는 순항했다.
     
하지만 출시 효과로 반짝 몰렸던 유저들이 후반부에선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급속도로 바닥난 것이다.  
     
접속자 수 그래프는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트래픽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4개월 만에 테라는 PC방 게임 점유율이 절반으로 곤두박질치며 1위 자리를 다시 내어줬다. 트래픽이 떨어지며 게임 아이템 거래량도 반 토막이 났다. 최고 레벨을 찍은 유저는 늘어나고 있었지만 콘텐츠 공급이 더뎠다. 3개월 무료 혜택이 끝난 뒤 유료 결제로 전환하는 이용자 비율은 기대보다 형편없었다.
     
경영진은 제작을 몰랐고 제작진은 경영을 몰랐다. 과도한 기대치로 시작한 일에 대한 대가를 지금에서야 치르고 있다는 비판이 회사 안팎에서 제기됐다.
     
     
해외시장에서도 참패하다
    
테라는 2012년 5월 북미와 유럽에 서비스를 개시했다. 하지만 서비스 개시 보름 뒤 블리자드에서 디아블로3가 출시됐다. 디아블로는 출시 첫 주 만에 630만 장의 판매를 기록하며 게임 시장을 무섭게 장악했다. 테라는 그에 힘 한 번 써보지 못했다. 판매량은 곤두박질치고 게임 매장에 유통된 패키지의 재고는 거의 그대로 남았다.
     
테라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해외 시장 문을 두드렸다. 중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개발팀이 직접 베이징으로 가 게임을 개발했다. 두 차례 중국에서 CBT를 진행할 때만 해도 서버 접속에 장애가 생길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출시 이후에는 생각한 대로 서비스가 돌아가지 않았다. 캐릭터 능력과 아이템 사이 밸런스가 붕괴 되고, 완성도에 실망을 느낀 유저들이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중국 팀은 최하위의 성과를 맛볼 수밖에 없었다.
     
     
구조조정과 부분 유료화
    
블루홀은 계속되는 적자에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전체 인원의 20%를 감원한 대규모 구조조정에도 재정 상태는 계속해서 빨간불이었다. 고육지책으로 테라는 요금제를 요금제를 월정액에서 부분 유료제(플레이는 무료이나 게임 내 재화는 유로로 구매 해야 하는 시스템)로 전환하게 된다.
     
2013년 테라는 부분유료제를 도입하고 반짝 인기를 다시 얻게 된다. 오랜만에 포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이름을 올리며 게이머들의 관심을 모았다. 동시 접속자 수와 하루 이용자 수가 3배가량 급증했다.
     
부분유로화 작업이 성과를 내며 해외 지역 매출도 3배 넘게 증가했다. 창사 이래 최대 매출인 499억 원, 첫 세 자릿수 영업이익인 131억 원을 기록하며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다. 한국 게임회사 영업이익 상위 10위 목록에 들어갔다.  
     
하지만 인기도 반짝이었고 상승곡선은 지속되지 못했다. 테라 트래픽은 줄줄이 빠졌나갔다. 경영난과 희망퇴직 등으로 경영진들은 날이 잔뜩 서 있었다. 장병규는 경영진 회의에서 볼펜을 내던지고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출처=픽사베이


모바일 게임 시장, 블루홀은 어떻게 살아남나
     
2014년 스마트폰 게임 매출 1천억 원의 시대가 열렸다. 넷마블, 위메이드, NHN 등이 수 십 종의 모바일 게임을 출시하거나 유통하면서 1천억 원대 매출을 기록했다. 다른 회사들이 모바일로 수익을 올릴 동안 2014년 테라 매출은 전년 대비 20.7% 감소했고, 순이익은 흑자에서 적자로 돌아섰다.
     
     
배틀그라운드의 시작
    
모바일 게임 시대, 블루홀은 ‘MMORPG의 명가’라는 오랜 비전을 수정하고 모바일 게임 본부를 신설했다. 소규모 모바일 게임 제작사들과 인수합병 해 여러 게임을 출시하며 각개전투를 펼쳐갔다.
     
모바일 게임 시대에 성공하겠다고 도전장을 내민 블루홀이지만 첫 모바일 게임 엘린원정대는 중국 시장에서 실패를 하고 개발 비용 20억 원을 날리게 된다.
     
다행히 모바일게임 볼링킹이 미국 안드로이드 앱스토어에서 무료 앱 28위를 기록하고, 하루 사용자 115만 명을 모으며 블루홀은 가까스로 자금줄을 댈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블루홀인 인수한 지노게임즈 출신 김창한이 PC게임 제안서를 하나 내밀었다. 최후의 1인이 살아남는 순간까지 전투를 하는 총싸움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외딴섬에 플레이어가 여럿 투입돼 총을 비롯한 다양한 무기와 탈것을 활용해 최후의 1인이 살아남는 순간까지 전투를 하는 MMO 슈팅 게임. 김창한은 해외시장에 곧바로 배급할 수 있는 파괴력 있는 PC 게임을 만들고자 했다.
     
바로 배틀그라운드 제작의 시작이었다.


적은 인력, 타이트한 일정 속에서 배그가 탄생하다
     
당시 프로젝트 BRO라 불렸던 배그 제작은 처음부터 순탄치 못했다. 김창한은 호기롭게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경영진들은 차가운 반응만 보였다.

장병규는 김창한 얘기에 번번이 어깃장을 놓았다. 장병규에게 100명이 한꺼번에 플레이 한다는 것 자체가 난도 높은 문제로 느껴졌다. 장병규는 배틀로열 게임의 창시자인 아일랜드 출신 브랜든 그린을 개발팀에 영입하면 프로젝트를 승인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2016년 3월 14일, BRO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배틀로열 장르의 태동기에 개발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재빨리 출시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프로젝트 승인 후 출시까지 기간을 최대 8개월로 잡는 타이트한 일정이었다. 작고 완결성 있게 게임을 출시하고 지속적으로 콘텐츠와 기능을 추가해가는 방향으로 개발 계획을 수립했다.
     
김창한과 20명 개발팀은 6주 동안 전력질주 한 다음 2주 동안 개발 결과를 테스트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다음 질주 준비했다.



출처=크래프톤


배틀로열 장르, 가능성을 보다
    
당시 배틀로열 게임은 주류 장르가 아니었다. 100명이 참가해 최후 생존자를 가리는 생존 확률 1%의 투쟁은 대중성과 거리가 멀었다. 싸움에서 패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게임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을 거라 아무도 판단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창한은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란 가능성을 보았다.  
     
김창한은 수십 종이나 되는 총의 각기 다른 특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폴란드 출신 개발자를 섭외해 게임 퀄리티를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박차를 가했다. 또한 게임 캐릭터의 움직임을 생동감 있게 구현하기 위해 실제 사람의 연기를 복제하는 모션 캡쳐 기술을 적용했다.
     
     
배틀그라운드, 회사 내에서는 찬밥신세?
    
김창한은 배틀로열 게임이 차세대 e스포츠가 될 가능성이 있다 제안해왔지만 경영진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이었다. 전폭적인 지원도 지지도 받지 못했다. 개발에 필요한 작은 도움을 구할 때마다 김창한의 장문의 메일을 써야했다. 당시 김창한은 그 울분을 땔감 삼아 배틀그라운드를 빚어냈다. 그렇게 김창한과 BRO 팀은 그들이 약속한 마일스톤을 거침없이 돌파했다.
     
2017년 1월 BRO의 마지막 마일스톤 평가가 열렸다. 퍼블리셔(배급사) 반응은 너무 마니악하다면서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배틀로얄 장르가 태동하기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반응이었다.

배그를 출시하기 전 블루홀 사업 개발실에서 한국의 코어 게이머 5명에게 배그를 미리 테스트해보게 했는데 대부분 낙제점을 줬다. 이에 장병규는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게임은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국내 퍼블리셔들도 비슷한 평가를 내리며 사업 제휴를 거절했다.



출처=크래프톤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대중은 YES라고 답했다
     
하지만 김창한은 스팀에서 정식으로 출시되기를 앞두고 진행한 CBT와 사전 판매 이벤트에서 대박 증조를 감지했다. 배그는 트위치에서 2주 연속 시청순위 2위에 이름을 올렸다. 200만 명을 팬으로 두고 있는 유튜버가 배그 영상을 자발적으로 올리는 등 방송 진행자와 선수들에게 칭찬 세례를 받았다.
     
중국에서 배그 라이브 중계 영상 시청자수 는 80만 명. 홍보, 마케팅 비용을 전혀 쓰지 않았는데도 트위치와 유튜브의 게임 스트리머들이 자진해 게임을 즐겼고 3주간의 CBT 기간 동안 트위치 방송 10위권에 늘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배틀그라운드는 주말 동안 매출 1100만 달러를 달성했다.
     
김창한은 정확한 과녁 설정으로 BRO팀의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다. 그렇게 김창한은 블루홀 10년 역사상 처음으로 최고 평가 등급 S를 받은 직원이 되었다. 경영진은 서둘러 김창한의 요구대로 배틀그라운드 서비스를 위한 별도의 조직을 꾸리고 BRO팀은 이름을 펍지로 바꿨다.

배그는 글로벌 서비스를 시작한지 16일 만에 최단기간내 100만 장 판매라는 기록을 쓰면서 괴물 게임으로 올라섰다. 배그는 출시 39일만에 판매량 200만 장을 돌파하고 동시 접속자수 14만 명으로 스팀 인기 게임 순위 1,2위를 다퉜다.
     
배그 전체 판매의 95%가 해외에서 발생했다. 7월 판매량은 6500만 장을 넘으며 2017년 스팀 유료 게임 가운데 유일하게 100만 장이 넘게 팔린 게임이 됐다. 배그로 블루홀은 모든 재무적 문제를 일순간에 해결 할 수 있게 됐다.
     
2018년 배틀그라운드는 블루홀이 그토록 바랐던 매출 10억 달러짜리 게임이 됐다. 블루홀은 크래프톤으로 사명을 바꾸고, 펍지 대표 김창한을 크래프톤 대표로 선임했다.

크래프톤은 2020년  매출 1조 6704억 원, 영업이익 7738억 원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치를 달성했다.

지난 8월 10일에는 국내 상장을 하며 게임업계 대장주에 등극했다. 시가총액은 22조1997억원으로 게임업계 1위인 엔씨소프트(시총 17조8925억 원)를 밀어내며 국내 게임사 중 가장 높은 시총을 기록하게 됐다. 

이에 크래프톤의 최대주주인 장병규는 3조원 대 주식 부호 반열에 올라섰다.





기획/제작  나주영 
리텍스트 Contents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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