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시스템에 공식 데뷔하는 조카, 내 걱정은 기우일까
딸이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어.
회사 선배가 한껏 들뜨고 상기된 표정으로 기분 좋은 소식을 전한다. 선배의 딸은 지금 캐나다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캐나다 명문대학에 원하는 전공으로 합격을 한 것이다. 장학금까지 받았다. 몇 년 전 그 선배와 함께 일하던 시절 간접적으로 그 딸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옆에서 본 나로서는 진심으로 축하를 해줬다. 너무 잘됐다.
선배의 남편은 외국 발령이 잦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몇 년간 외국 생활을 할 기회가 많았다. 내가 그 선배와 함께 일했던 몇 년 전은 남편의 한국 발령으로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던 때였다. 마침 그 딸이 중학생일 때다. 선배의 딸은 선천적으로 책을 좋아하고 공부를 재미있어하는 아이였다. 실제로 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현지 선생들은 이 아이는 특별하다며 영재 교육을 하자고 한 아이였다. 그만큼 선배의 기대도 컸던 아이다. 하지만 그 딸이 한국에 들어와 한국 교육 시스템에 편입이 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그 아이는 더 이상 영재가 아니었다.
학교 공부를 따라가기도 벅찼다. 중학교 2학년이었지만 같은 반 친구들은 이미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인 수학 정석을 다 끝내고 수학 1로 넘어가고 있었다. 선배는 딸을 어떤 학원에 넣어야 한다며 학원 입학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또 다른 학원에 아이를 보내는 중이었다. 나는 선배를 옆에서 보면서 그야말로 강남 사교육의 현장이 어떤지 똑똑히 봤다. 저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아이들은 경쟁에 내몰리고 있었다. 아이는 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지만 학교 성적은 중간쯤이었고 그렇게 아이의 자존감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마침 선배의 남편이 다시 해외 발령이 났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딸은 다시 캐나다 교육 시스템으로 들어갔다. 딸은 다시 자신감을 얻는다. 산소와 수소가 물이 되는 과정을 한 학기 내내 배우는 학교 수업이 너무 재미있다. 밤새 공부를 해도 지치지 않는다. 사교육은 당연히 없다. 공부를 좋아했던 그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를 이기려고 경쟁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공부가 아니라 말 그대로 좋아서 하는 그 자체로 ‘공부’ 말이다. 학교 성적은 공부를 좋아하는 만큼 나왔고 대학입시 시험이 따로 없는 캐나다에서 학교 성적으로 무난하게 여러 대학에 합격했다. 그중 가장 원했던 캐나다 최고 대학교를 선택했다.
이 아이가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면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었을까. 확답은 못하겠지만 이건 알겠다. 한국은 엄청난 잠재력이 있는 한 아이를 캐나다에 빼앗겼다는 사실. 그 아이는 이제 캐나다 명문 대학을 나와 그곳에서 마음껏 연구를 하며 행복하게 살 것이다. 캐나다 학문에 기여하며.
축하를 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에 씁쓸한 기운이 뚝뚝 떨어지고 고개가 점점 숙여진다. 학창 시절이 생각난다. 치열하게 경쟁만 하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내 옆에 쓰러져있는 이 많은 사람들은 또 누구인가. 한국의 교육 현실이다.
올해 조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된다.
한국 교육 시스템에 공식적으로 데뷔를 하는 것이다. 입학 선물을 사줘야 하는데 자꾸 생각이 많아진다. 우리 조카 잘할 수 있겠지,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할까, 마치 전장으로 떠나는 자식을 보듯 걱정이 되고 조바심이 난다. 내가 겪었던 그 지난한 시절을 저 조그만 아이가 버틸 수 있을까.
남편과 나 사이에 아직 아이가 없다.
아직 계획도 없다. 하루는 아이 낳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다 머리가 아파왔다. 그 아이와 길고 캄캄한 터널 같은 한국 교육을 같이 임할 생각 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한데, 마음껏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익히는 지금이 너무 좋은데, 학창 시절 경쟁에 밀려나 사회에서 받은 차별을 이제 막 치료했는데, 다시 한국 교육에 던져질 생각을 하니 숨이 막혀왔다. 아이를 언제 낳을 거냐는 주변 걱정에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핑계는 육아에 대한 두려움, 일에 대한 경력, 경제력 따위보다는 사실 한국 교육 시스템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한국 교육은 나에게 그리 좋은 추억을 남기지 않았다.
내가 낳아 세상에 던질 한 고귀한 생명체는 과연 이 세상에 나와 행복할까.
선배의 사례를 보니 답은 확실해졌다. 한국에서는 쉽게 행복하기 힘들다. 만약 그 아이가 암기에 특출 난 재능이 있고 반복 학습에 능하며 공부 외에는 별다른 흥미도 없고 운 좋게 좋은 부모(?)까지 만나 사교육을 마음껏 지원받고 있다면 행복할 수도 있겠다. 좋은 점수가 그 아이의 자존감이 되고 좋은 대학이 그 아이의 정체성이 되어 우리 사회 ‘엘리트’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행복한가.
내가 만약 아이를 낳는다면 어떻게든 해외에서 살고 싶다.
이게 내 본심이다. 아이가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이 세상을 오감으로 체험하고 경험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아이를 암기만 하는 공부 기계보다는 아이가 가진 가능성을 지켜보며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싶다. 얼토당토않게 자신에게 매겨지는 등수에 자존감이 좌지우지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그런 아이로 키우고 싶다.
그러려면 나는 한국을 떠나야 하는 걸까. 고민만 깊어지는 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