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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세라 Jun 29. 2021

딩크를 대하는 쿨함과 우울함

딩크를 바라보는 시선에 나로서 대하기

아직 아이가 없다고?



결혼을 했지만 아이가 없다고 말하는 일이 언제부턴가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가 없다고 말하고 나서 흐르는 아주 잠깐의 침묵이 왠지 불편하다.


그러다 보니 이제 아이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내 승모근이 살짝 올라붙는다.


내 어깨 주변의 근육이 수축되어 스멀스멀 흘러나온 감정이 목을 타고 턱과 입 그리고 눈 주위 근육까지 자극한다.


내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시간, 아직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 감정을 표현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딩크를 바라보는 시선
쿨하거나 우울하거나



결혼 7년 차, 아직 아이가 없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대체로 두 가지였다.


쿨하거나 아니면 우울하거나.


“그래, 요즘은 아이 없는 부부들 많더라. 딩크족이 편하고 좋지.”라는 쿨함.


나 역시 쿨함에 응답하듯 눈웃음을 짓지만 입은 아직 쿨하지 못한가 보다.


“딩크족은 아니에요. 그냥 당장 계획이 없을 뿐이죠.” 입모양으로 속삭인다.


딩크족은 왠지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자신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뿌리가 아주 깊구나를 느낄 수 있는 지난 몇 년이었다.


“아.. 음.. 두 분이 아직 아이를 원하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라는 우울함.


잠깐의 침묵 후에 조심스럽게 나를 배려하는 질문을 하지만 그 말투에 담긴 우울함까지는 조심스럽게 감추지 못하는 것 같다.


“네, 아직 계획이 없어요.” 나 역시 그 배려에 응해 다정하게 눈을 맞추고 대답을 해준다.


그의 우울함이 없어지도록 최대한 밝게 말이다.


쿨함에도 우울함에도 이제는 적응이 되어서 상황에 맞춘 대답과 표정으로 응한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이렇게 말할 때다.


“남편이 딩크족이에요.”


그 바람에 생각지 않은 딩크가 7년 째인데, 가만 보니 이 생활도 나쁘지 않고, 하지만 그래도 아이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 중이라는 내 이야기에 나도 상대도 할 말을 잃는다.


쿨하거나 우울하거나.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나는 쿨하지도 우울하지도 않다



내 감정은 쿨함과 우울함, 그 어디쯤이다.


아니 어쩌면 아주 동떨어진 어떤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배려해주는 그들이 고맙지만 솔직히 나는 어느 반응에도 불편하다.


나는 쿨하지도 우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직 아이가 없다는 말을 할 때면 올라붙는 승모근, 수축되는 어깨, 경직되는 안면근육은 그 불편함을 학습한 결과일 것이다.


언제가 나도 모르게 쿨함과 우울함을 연기하는 나를 알아채버렸다.


상대의 배려와 경험과 성격에 따라 나오는 그의 감정에 내 감정도 똑같이 맞춰냈다.


상대가 나를 쿨하게 대하면 쿨한 척, 우울하게 대하면 우울한 척하며 세상이 바라보는 딩크에 대한 시선에 나를 끼우고 있었다.


아직 나는 어떤 감정인지 정리가 되지 않았는데 상대가 보이는 감정이 눈에 보이니 나도 쿨하면 되나, 나도 우울하면 되나, 또 그렇게 연기를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좋은 연기자가 아니라 연기 후 돌아서서 내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내 감정은 뭐지? 정말 쿨하니? 정말 우울하니? 나에게 세상의 시선은 그저 불편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쿨함과 우울함
그 어디쯤



이제는 조금 다른 배려를 받고 싶다.


세상의 기준은 내 정체성을 말해주지 않지만 고민 없이 내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게 참 많다.


나는 여자이고, 결혼을 해야 하고,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어야 하고, 아이에게 희생하는 부모여야 하는 것.


나는 여자일까 하고, 결혼은 왜 할까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나 하고, 아이에게 희생만 해야 하나 하고 의문이 드는 순간 나는 사회의 시선에 맞서야 한다.


그 시선이 부담스럽고 어떨 때는 날카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다고 물러서기에는 괜히 억울하지 않나, 괜히 ‘내 인생 소중해’ 외치고 싶지 않나.


나 역시 누군가를 정해진 틀에 넣어 객관식으로 주어진 감정 중 하나를 골라 대하지는 않았는지 나부터 돌아본다.


그리고 내 삶도 굽어본다.


딩크는 내 생활을 한마디로 표현하기 위해 차용하는 단어일 뿐 그 ‘딩크’는 나를 정하지 않는다.


‘딩크’라고 일부러 쿨하게 꾸미고 싶지 않고, 일부러 우울하게 위로받고 싶지 않다.

  

그저 난 지금 결혼을 선택해서 반려자가 있고 아직 아이는 없다는 것, 그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적어도 남편 한 사람과 나 사이 균형을 지키고 우리의 삶에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쿨함과 우울함 그 어디쯤 내 감정도 자라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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